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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Jun 22. 2022

커리어 그리고 가정 - 클라우디아 골딘

여성들은 할 만큼 했어, 노동 구조는 누가 바꿀래?

커리어 그리고 가정

클라우디아 골딘


여성 상위시대라는 말은 내가 초, 중학생 때부터 줄곧 들었던 말이었다. 이제 여자들이 일을 하고 커리어를 쌓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남자들만큼, 아니 남자들보다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여자들이 많아졌다고. '알파걸'이 넘쳐나는 세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커리어 그리고 가정>에서도 짚어냈듯이, '커리어 우먼'은 있지만 '커리어 맨'은 없는 세상, '알파걸'은 넘쳐나지만 '알파보이'는 안 보이는 세상은 확실히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이미 남자들에게 '커리어'는 기본값이었고, 인간 중 '알파'는 보이들이었으니까,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새로운 여성, 걸들에게는 마땅히 남자와 같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알릴만한 이름을 붙여줘야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커리어 우먼'과 '알파걸'들은 과연 정말 성차별 없는 세상에서 남자들만큼 모든 걸 누리고 살고 있을까?


<커리어 그리고 가정>은 미국 대졸 여성의 120년을 톺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세대별로 다섯 가지 집단으로 구분했다. 세세한 연도 구별은 외울 수 없어도, 다섯 집단의 차이와 미국 역사를 매치시켜 이해할 수는 있었다.

집단 1은 대학에 진학을 한 여성이 비율 자체가 적은 시대였다. 아주 오래 전, 여자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가까스로 주어졌던 때. 그때 대학을 졸업한 여성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커리어를 추구하려면 가정을 꾸리는 걸 포기해야했고, 가정을 꾸리면 커리어는 물건너 간 꿈이 되었다.

집단 2는 대공황과 맞물려 여성들에게 기회가 제한적으로 주어졌던 시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여성들이 진출할 수 있는 화이트칼라 직종이 대폭 증가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 여성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었지만, 가정을 이루는 동시에 그만두어야 하는 제약이 가장 컸다.

집단 3은 기혼 여성에게 있던 제약이 많이 사라진 시기였다. 제 2차 세계 대전 탓에 남성들의 경제 활동이 줄어든 덕분도 있었다. 여성들은 가정을 꾸린 다음 아이가 다 자라면 자연스레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집단 4는 집단 3의 여성들이 뒤늦게 일자리를 갖고 커리어를 추구해나가는 모습을 보며, 가정과 커리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커리어를 먼저 좇던 집단이었다. 피임약이 대중화되면서 커리어를 향해 달려 나가는 여성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생체시계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이 떨어졌던 탓에, 그리고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탓에, 뒤늦게 가정을 이루려던 여성들이 아이를 갖기는 쉽지 않았다.

가장 최근의 여성들인, 집단 5는 커리어도 가정도 모두 성공적으로 잡은 첫 세대로 분류된다. 커리어를 추구하다가 발전된 과학의 힘으로 늦은 나이에도 생식이 가능해진 덕분에 가정도 꾸릴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가정을 꾸린 다음에 서서히 느려지는 커리어의 시계였다. 여성들이 아이를 갖게 되면서 커리어의 시계를 멈추는 이 현상을 가정 내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혹은 상차별적인 직장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노동 구조의 문제였다는 점을 클라우디아 골딘 교수가 짚어냈다.

책의 1장부터 7장까지는 이 다섯 집단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8장은 여성들의 무수한 노력에도 왜 성별 임금 격차가 사라지지 않는지를 짚어냈다. 9장에서는 미국의 변호사와 약사를 예로 들어서 성별 임금 격차를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 희망을 보여주었고, 10장과 에필로그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코로나 시대로 접어든 지금, 노동 구조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방향성을 제시했다.

책을 읽으면서, '아메리카노Know'라는 팟캐스트를 함께 들었는데, 같은 독서모임의 멤버분이 적극 추천하여 2020년 시리즈부터 정주행하며 듣던 것이었다. 올해로 3년째 되는 팟캐스트가, 이번 시즌에는 책을 함께 읽어보는 시리즈를 기획했는데 덕분에 중간에 못 들은 부분 건너 뛰고 <커리어 그리고 가정>을 소개하는 부분만 함께 읽으며 들었다.

'아메리카노'에서 책을 자세히 설명해주면서도 책 바깥의 곁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함께 소개해준 덕분에, 책의 이해도를 더 높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러가지 통계와 연구 자료, 논문들을 바탕으로 설명해주는 수준 높은 팟캐스트로 책을 한 번 듣고, 또 도표와 인용 자료들이 풍부한 책을 활자로 읽으니 머릿속에 더 쏙쏙 들어오는 것 같았다. 서로 다른 매체로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듣는 것이 확실히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여성들은 많은 것을 이뤄냈다. 그건 정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의 기회가 전무하던 시절에도 어떻게든 배움을 추구하던 여성들이, 이제는 대학 입학 정원의 절반 이상이 된 여성들이, 차근히 성취한 결과들을 연대순으로 짚어나가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는다. 더불어 나는 비교적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나의 커리어를 돌아보게 되었다. '커리어'라고 부르고 싶은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직장을 잘 다니고 있다. 만족할 만한 보수는 아니어도 적당히 받고 있으며,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적절히 써먹으면서도 일하는 과정에서 새로 배우는 것들도 많다. 이 정도면 '커리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앞으로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여자들도 커리어를 추구해나가야 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있진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커리어'란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요즘 세상에도 '커리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많나? 그냥 다들 마지못해 돈 벌려고 하는 일들인 거 아니야? 나만 그래?

이게 내 잘못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책에서 노동 구조를 언급하는 부분에, 내 문제도 노동 구조 탓을 돌리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어했던 일, 흥미를 이끄는 일, 재미있는 일,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만족스러운 보수를 받지 못하는 것은 모두 노동 구조 탓이다. 모든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면 가장 좋겠지만, 적어도 어떤 일을 하든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어야 하는데, 세상에는 정말 많은 노동들이 평가절하되어 말도 안 되는 낮은 보수를 받으며 장시간 일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런 세상은 확실히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바꿔야 할 것은 이제 세상이고 세상의 구조라는 답이 나온다.

한 발짝 더 성평등에 가까워지고, 또 차별에서 멀어지려면 이제는 노동의 구조화된 방식을 바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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