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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Jul 14. 2022

차녀 힙합 - 이진송

차녀 힙합

이진송


P. 146. 기독교에 원죄의식이 있다면 한국에는 '효'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8-90년대에 태어난 딸로 산다는 것은 삶 자체가 탄생부터가 페미니즘 투쟁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의 탄생은 일단은 축복에서 시작됐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며 합의했던 나의 부모는 그렇게 첫 번째 아이가 고추를 달고 태어나지 않을 것을 보고도 실망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엄마는 그랬을 것 같은데, "그래도 집에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둘째 낳기를 종용했던 아빠에게는 내가 적잖이 실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보면 그 당시 횡행했던 여아 선별 낙태에서 나도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일화를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듣고서는 그동안 내가 느꼈던, 어린 시절 내내 이어진 미묘하고 뭔가 콕 찝어 말할 수 없던 부당한 대우들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나는 외동으로 부모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그렇지만 나는 영원히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며 어떻게 효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K-장녀일 것이다.


이진송의 <차녀 힙합>은 언니가 있는 둘째 딸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지만, 결국엔 돌고 돌아 한국에서 나고 자란 딸의 이야기 전반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또 마이크와 관심을 빼앗겼다며 차녀들이 슬퍼할까, 아니면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하며 의기소침해할까? 하지만 작가 자신도 중립기어 박듯이 "현실 세계가 여성을 2등 시민 취급하기에, 세상 모든 여성은 가정 내 출생 순서와 무관하게 '차녀성'을 가진다"(P. 70.)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2등들에게, 비교적 관심을 덜 받는, 조명받지 못한 모든 이들이 바로 '차녀'가 아니겠는가.

<차녀 힙합>을 읽으면서 내 남동생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는 "차남이 아니라 장남!"(P.151) 이기 때문에 책에서 서술되는 '차녀성'을 가진다고 말하기 모호한 부분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집안의 '장남'이 태어나는 바람에 '장녀성'과 '차녀성'을 동시에 떠맡게 된 내 처지를 더 많이 생각했다.


P. 211 누군가와 나누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애정을 향한 원초적 갈망과 우선순위에서 끝없이 밀리는 주변부의 경험. 이 모두를 이리저리 뭉쳐 '차녀성'이라고 이름 짓는다.


동생과 나눠 가져야했던 부모의 사랑. 동생에게 자꾸만 양보하라고 하는 부모의 압박. 내가 좋아하는 장어 구이를 먹으러 가서도 '남자들에게 좋은 것'이라던 꼬리는 늘 아빠와 동생에게 양보해야만 했던 순간들, 두 마리 치킨을 시키면 닭다리 두 개는 동생이 먹고, 하나는 아빠, 하나는 내가 먹었던 기억들. (두 마리 치킨에 닭다리 네 개면 한 사람이 하나씩 먹어야지!)

유년 시절을 돌아보면 어떻게든 부모에게 관심받고 싶어 애썼던 나의 모습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와서, 혹은 얌전하고 손이 덜 가는 아이처럼, 철이 든 아이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던 나날들. 내 기억의 편향일수 있겠지만, 그에 비해 동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 부모님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그러고보니, 20XX년 대만으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가 떠오른다. 여행 기간 내내 심통이 나 있던 남동생, 표정은 계속 굳어있고 함께 사진 찍자던 부모님의 요청에도 그다지 협조적으로 굴지 않았고, 그런 동생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엄마와 아빠, 그리고 그런 엄마와 아빠의 눈치를 보는 나... 내가 그렇게 입을 빼죽 내밀고 예의 없게 굴었어도 엄마와 아빠는 사근거리며 좋은 말로 날 달래려고 들었을까? 아니면 분위기 망친다며 버럭 화를 냈을까? 애초에 나는 그렇게 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아들'이 가진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차녀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하고 싶었지만, 내가 차녀가 아니기 때문에 장녀로서 느꼈던 '차녀성'의 경험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이제껏 장녀로서의 고통을 토로하는 이야기는 꽤 많았다. 동생이 많은 장녀, 혹은 남동생만 있는 장녀. 심지어 오빠가 있는 차녀지만 오빠를 아기 돌보듯 돌봐야 하는 장녀성을 가진 차녀까지도. 하지만 언니가 있고 동생(들)이 있는, 중간에 낀 차녀에 대한 이야기는 비교적 많이 회자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이제야 정돈된 책으로 읽으니,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확장되었다.

이제는 나도, 인간 관계에 조금 더 예민하고 주변을 더 세심하게 잘 챙기는 어떤 특징을 보이는 사람을 보면 조심스럽게 '혹시 차녀신가요?'하고 추측해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릴 때 나는 계속 '언니'가 갖고 싶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다) 나보다 먼저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고, 어려운 일들을 맛보기처럼 한 다음 나에게 편안한 길을 알려주고 인도해줄 수 있는 사람. 혼이 나면 나보다 먼저 더 많이 혼이 나고, 내가 겪은 부당한 일에 앞장 서서 따지고 들어주고 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오빠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언니는 늘 갖고 싶었다.

재밌는 일이지만, 차녀의 설움을 토로한 이 책을 읽고서는 더더욱 언니가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진송 작가와 그 언니와의 관계가 부럽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언니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여동생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여동생 낳아달라고 떼를 쓴 적도 있다. 남동생처럼 무뚝뚝하고 내 맘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시커먼 거 말고, 나를 잘 따르고 사근거리는 여동생이이 있다면 엄마 아빠가 시키지 않아도 나서서 잘 챙겨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고보면 나도 여동생의 쓸모를 '귀엽고 아양을 떠는 고명'정도로만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의 삶이 "'죽어야 끝나는 증명 환장 라이프'일지도" 모른다는 이진송 작가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을 것"이라며 "누구의 인정도 갈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글을 마무리한다. (P. 261) 그의 바람대로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내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인정을 갈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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