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토론토의 프라이드
30. 토론토의 프라이드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이 언제냐고 물으면, 나는 꼭 퀴어 페스티벌(퍼레이드)을 꼽았다. 중, 고등학생 때, 마치 전설의 축제라도 되는 양, 대학을 서울로 가면 꼭 퀴어 축제에 갈 거라는 다짐도 여러 번 했었는데 막상 대학생이 되고서는 학교생활에 바빠서 가볼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가 휴학을 하고서 학교 바깥의 생활을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퀴어 축제를 갔는데, 그때는 을지 한빛거리에서 비교적 아담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축제 막바지에 종로 쪽으로 행진을 하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는데, 벌써 십 년 전이라 기억이 희미하다.
그다음은 신촌 쪽에서도 행사가 열렸고, 어느 순간부터는 시청을 장악해서는 행진하는 거리도 길어지고 행렬도 많이 늘어나 명실공히 서울에서 열리는 큰 축제 중 하나가 되었다.
단 하루 열리는 이 축제를 위해서 각종 LGBT+ 단체는 시청에 집회 신고를 해야 하고, 신고할 때도 성소수자의 인권을 '반대'하는 혐오 세력과 기싸움을 해야 했으며, 마침내 행사가 시작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혐오 세력과 부딪혀야 했다. 실제 축제 기간은 퀴어 필름 페스티벌과 갖가지 소규모 행사들을 모두 합쳐 일주일 남짓이지만, 보통은 행진을 하는 '퀴어 퍼레이드' 날만을 축제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날이 혐오 세력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날이기도 하다.
행사의 주최자나 참가 단체에 소속한 일원이 아니었던 일개 구경꾼 퀴어 1로서, 퀴어 축제는 축제 자체의 즐거움도 있지만, 혐오 세력이 얼마나 거지발싸개 같은 소리를 하는지, 얼마나 전심전력으로 축제를 방해하려 드는지를 관찰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물론, 행사장까지 잠입해서 참가자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까지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국의 퀴어 축제에서 혐오 세력이 한복을 입고 북춤을 추는 게 빠지면 어쩐지 서운하다고나 할까.
2018년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참여했던 퀴어 축제에 관한 글도, 그래서인지 혐오 세력에 대한 짧은 생각을 늘어놓은 글이었다. (https://brunch.co.kr/@kimraina/220)
토론토에 오기로 결정하면서, 그래서 가장 기대했던 것 중에 하나도 퀴어 축제였다. 토론토의 퀴어 축제,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고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지난 2년간 전염병이 모든 대면 축제를 쓸고 지나가 버린 탓에 그 유명한 퀴어 축제도 비대면으로 치러졌다.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축제를 의무적으로 참가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행진이 없는 퀴어 축제는 무슨 재미냐는 생각에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갔던 것 같다.
그러다가 2022년이 왔다! 코비드 19가 조금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고 생각하는 시점, 더 이상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정부의 지침이 나오고, 한동안 열리지 않았던 각종 축제들이 슬그머니 다시 개최되기 시작한 때, 토론토 프라이드 퍼레이드도 개최를 선언했다.
2년이나 놓쳤다. 이번에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토론토 한인 페미니스트 그룹 윈드 WIND 모임에서 프라이드 퍼레이드 행진 참가를 제안했다. 비영리 단체의 참가는 참가비 50불을 내고 당일 행사 관련한 보험을 들었다는 증서만 제출하면 참가가 가능했다. 기업이나 영리 단체는 참가비가 더 비쌌고 더 많은 인원을 행진에 참여시킬 수 있었지만, 자그마한 우리 모임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사실은 어떤 단체의 소속으로 퀴어 축제에 참가하기는 이번이 난생처음이었다. 한국에서는 단체로 참가하지 않아도 누구나 행진에 끼어들어 걸을 수 있었기 때문에, 행진 참가 신청을 미리 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 낯설고 신기하게 여겨졌다. 즉, 단체 소속으로 참가 신청을 해서 행진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개인 자격으로는 참가가 쉽지 않다는 점이 한국과 다른 토론토 프라이드의 특징이었다.
그렇다면 만약에 내가 속한 단체가 없으면 어떻게 즐길 수 있었을까? 꼭 행진 행렬에 속해 걷지 않아도, 행렬 바깥에서 걷거나 혹은 행렬을 향해 응원을 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즐길 수도 있다. 한국에는 '행진 바깥에서 응원하는 것'이 비교적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행진을 하는 것도 좋았지만, 확실히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플래카드를 들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행진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소속감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대단한 걸 하지는 않아도 우리 단체가 토론토 시민들에게 환영받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짜릿했다.
그래서인지 행진하는 내내, 이런 축제는 정말 1년 365일 해도 모자라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소수자의 삶에서,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환영받는 삶으로. 퀴어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한국과 비교했을 때 토론토 프라이드의 또 다른 특징은, 역시 '혐오 세력'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축제 전까지 걱정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다양성의 도시, 토론토라고 해도 LGBT+를 응원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토론토 프라이드 바로 전날,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퀴어 축제를 앞두고 혐오 세력의 총기 난사로 두 명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한국은 혐오 세력의 폭력이래 봤자 주먹다짐 내지는 똥물 투척 정도인데(이 정도는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북미에서는 혐오 세력의 폭력은 곧 살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물론 캐나다는 미국만큼 총기 구입이 쉬운 나라도 아니고, 아무나 총을 들고 다니는 곳도 아니지만, 이따금 들리는 총기 사고 소식은 충분히 긴장감을 얹을만했다.
실제 행사 당일, 행진을 대기하는 장소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캐리어 가방 하나가 도로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경찰이 주인을 찾는 소리를 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한 발 두 발 캐리어 가방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말로 내뱉지는 않았어도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한 것이, 혹시 혐오 세력의 폭탄 테러는 아닐까 하는 걱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다행히 주인이 곧 등장해서 폭발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덕분에 작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북미에서 혐오 세력과의 대치는 총기 사고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토론토 프라이드 행진은 2km 남짓이었다. 그냥 걸으면 30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는데, 프라이드 행진으로는 두 시간이 넘도록 걸었다. 앞선 단체들의 행진이 어땠길래 자꾸 가다 서다를 반복했는지 너무 궁금할 지경이었는데, 행진 자체를 공연으로 만들어버리는 단체들의 사진을 보니 곧 납득이 갔다. 열 명도 채 안 되는 윈드 모임은 케이팝 음악에 맞춰 신나게 방방 뛰는 게 전부였는데 말이다.
한국의 박진감 넘치고 속도가 빠른 행진에 비하면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행진이었지만 도시 곳곳에서, 각자의 집에서 혹은 식당에서, 그리고 건축 구조물 사이사이에서 자기만의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꽤 쏠쏠했다.
확실히 토론토의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상업화되어서 다 장사 속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혐오 세력과 대치하느라 진을 빼는 한국의 축제만을 봤던 나에게는,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그래서 평화롭고 아늑했다.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소속감을 느끼고, 모든 사람들이 내 존재를 긍정해주고 환영해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은 아주 다른 경험이었다.
한국에 있는 나의 친구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리고 성소수자의 달에, 퀴어 축제를 단 하루만 '허락'하면서 '문란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달았던 서울 시청의 집회 허가문이 더 씁쓸하게 느껴졌다.
퀴어 퍼레이드, 퀴어 축제라는 명칭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프라이드 퍼레이드'라는 이름에 더 단단함을 느낀다. 비단, 자부심, 자신감을 의미해서만은 아니다. 사자의 무리를 영어로는 '프라이드'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사자들의 축제 같다고 느꼈다. 동물들의 제왕이라는 사자처럼,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는 우리들을 생각하면 '프라이드'만큼 멋진 단어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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