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29. I am engaged! (나 약혼했어!)

by 희연

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29. I am engaged! (나 약혼했어!)


약혼을 했다.

원래 에세이 쓸 때는, 사건(?)이 벌어진 날로부터 최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경과한 것으로만 쓰려고 했는데, 이런 빅 뉴스를 안 쓸 수가 없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약혼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약혼이라니, 쓰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고 어쩐지 어색하기만 한데 내가 그런걸 했다는 게 신기하다. 약혼자라는 호칭은 어색하지만, 피앙세라는 단어는 괜찮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걸 또 글자로 쓰는 거랑 말로 뱉는 게 다르더라.


피앙세는 프랑스어인데,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가 다른 프랑스어에서 남자는 "fiancé"라고 쓰고 여자는 e가 하나 더 붙어 "fiancée"라고 쓰지만, 발음은 '피앙세'로 같다. 영어로는 남성 명사 쪽을 따와서(아무렴 인간의 디폴트는 남자니까) fiance라고 쓰는데 굳이 프랑스어처럼 구별해서 여성에겐 fiancee라고 쓰는 사람도 더러 있다.


몇 년 전,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를 두고 친구와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 호주에서 만났던 친구들에게 "나 한국에 피앙세 있어. 한국 돌아가면 결혼할 거야."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땐 '피앙세'라는 단어가 그렇게 낯간지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 남자분과는 잘되지 않았으니까 지금의 나는 캐나다에서 지금의 짝꿍을 만나 약혼을 한 건데, 그때와 지금의 감정의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지금은 왜 이렇게도 낯간지럽고 부끄러운 건지.

여러 가지 가설이 떠올랐는데, 그 당시에는 지금만큼 영어가 입에 익지 않아서 단어 하나하나에 세밀한 감정을 느낄 정도가 아니었던 반면 지금은 영어가 그때보단 더 편해지고 익숙해서 단어마다 가지는 감각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하는 가설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가설은, 정식 프러포즈를 받았는가 아닌가에 있는 것 같았다.

커플링과 커플 시계, 영원을 약속하긴 했던 그 시절.

그때 그 친구와는 커플링을 나눠 끼고선 구두로 내가 호주에서 돌아오면 결혼을 준비하자는 약속을 한 게 전부였다. 그것도 당시의 내 마음이 깊었으니까, 그리고 아주 진지한 약속이라고 믿었으니까 호주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그를 피앙세라고 소개한 것이었지만 이만큼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마 그 친구에게 그 약속은 그저 커플끼리 하는 빈 깡통 같은 영원의 약속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짝꿍은, 함께 살기로 결정하면서 서로 결혼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결혼에 관한 이야기도 여러 차례 나누었고 앞으로의 삶을 함께 어떻게 꾸려나갈지도 같이 머리 맞댄 채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서 막연히, 이렇게 살다가 결혼하겠거니, 라는 마음이 있었던 와중에, 농담으로 네가 나한테 프러포즈해야지, 아니야 네가 나한테 해야지, 를 주고받았던 그 와중에, 느닷없이 아무런 예고 없이 프러포즈를 받았다.


2022년 5월 23일, 내 남동생의 생일이기도 하고 캐나다에서는 빅토리아 데이 Victoria Day로 휴일이었던 월요일. 예매해둔 한국 영화를 보러 가야 하는데 짝꿍은 낮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해롱대며 "지금 일어나야만 해?"라고 물었던 오후. 같이 뭔갈 하려 하면 매일 엉덩이 무거운 ADHD 인간을 자꾸 달래고 재촉하고 우쭈쭈해야 한다는 것에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던 날. 그리고 그 서운한 감정을 잘 정리해서,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행히 내 마음은 금방 풀어져서 같이 재밌게 영화를 보러 갈 수 있었다.

거의 유일하게 한국 영화를 상영해주는 상영관은 노스욕이라는 한인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 있어서, 차로 40여 분을 달려가야 했다. 구글 지도 역시 40분은 걸릴 거라고 예고했지만, 길이 많이 막히지 않은 덕분에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고 영화도 처음부터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한식이 먹고 싶어서 근처 한국식당을 찾아갔고, 밥을 먹은 후에는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하여 옛날의 콜드 스톤을 떠올리게 하는 마블 슬랩 아이스크림 매장을 찾아가서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여름이 다가왔지만 해가 떨어진 후에는 날이 쌀쌀했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산책을 하고 싶어 했던 짝꿍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 동네 주변을 같이 산책하자는 약속을 하고서는 집으로 돌아왔고, 벌써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어서 사실은 밤 산책도 조금 귀찮아진 참이었다.

머릿속엔 온갖 시간 계산에 정신없이 바빴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열한 시 정도 될 테고 그때부터 내일 먹을 도시락을 준비해서 싸면 열두 시가 될 테니 빠듯하게만 느껴졌는데, 이 와중에 5분만 같이 걷자는 짝꿍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빅토리아 데이라고 동네 여기저기서 작은 불꽃놀이를 빵빵 터뜨리는데, 불꽃놀이에 눈 돌아가는 어린아이 같은 나의 마음이 '어서 밖에 나가서 불꽃놀이 구경해!'라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 동네는 주변에 공원도 있고 초등학교도 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하우스가 밀집된 동네라 집집마다 앞마당 꾸며놓은 걸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한 곳이다. 5분 정도 걸으면 산책로도 있고, 10분 남짓 걸어가면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니는 트래킹 길도 있다.

늦은 밤에 혼자 다녀도 아무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은 안전한 동네. 그리고 겨우 5분 산책이니 대충 입고 나가도 괜찮겠지, 라는 생각에, 아까 아이스크림 먹으며 걸을 때 조금 추웠으니까, 하는 생각에, 잠옷으로 입었던 수면 바지와 아직 정리해 넣어놓지 않은 패딩을 걸치고 짝꿍과 함께 산책을 나섰다.

매일 하는 시답잖은 대화가 오갔다. 짝꿍이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나랑 살아 줄 거지?"라고 하길래, 아침의 일을 생각하며 농담처럼 "네가 협조적으로 잘 나오기만 한다면 말이야."하고 대꾸했다.

자그마한 놀이터를 끼고 있는 잔디밭 앞에 서서, 펜스 너머의 작은 아파트 단지 마당에서 귀여운 불꽃이 팡팡 터지는 소리와 아이들의 꺄르륵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짝꿍은 "나도 너의 협조가 필요해."라는 말을 하며 살짝 앞서 걸어가던 나를 세웠다.

오렌지빛 가로등이 어둠 속에서도 환했다. 그리고 그 아래서 짝꿍은 한쪽 무릎을 꿇고 반지 케이스를 들어 보이면서 이렇게 질문했다.


"Will you marry me?" (나랑 결혼해 줄래?)

장난일 거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너 진심이야? 정말이야? 왜? 이거 뭐야? 농담 아니지? 하고 대답 대신 질문을 쏟아내 버렸다. 그래서 답은 예스야? 라고 묻길래 그제야 예스라고 대답을 해주었는데도, 그리고 반지를 손에 끼우고서 반지에 대해 설명하는 짝꿍을 보면서도 (가운데는 다이아고 주변에 다른 보석들이 둘러싸고 있고 링 위에 이만큼도 작은 보석들 있고 또 아래쪽에도 있고, 설명을 멈추지 못하는 이 사람을 어찌할꼬.) 어안이 벙벙했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 반지를 주며 프러포즈하면 여자는 대부분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또 전혀 예상한 적이 없었다는 듯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던데. 나는 놀라긴 놀랐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현실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정말 아무런 예고가 없었으니까.

내심 이렇게 대충 같이 살다가 얼렁뚱땅 결혼하겠고 예상을 하고 있었고, 진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농담으로는 프러포즈 언제할 거냐고 서로 놀리듯 말하곤 했어도, 진짜 반지까지 준비된 프러포즈를 바라진 않았었다.

상상해본 적 없어도, 바란 적 없어도, 실제로 받으니 놀랍고 얼떨떨하면서도 기쁜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프러포즈다운 프러포즈를 받고 나니까 실감이 났다. 우린 그냥 같이 살다가 말 커플이 아니라 정말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구나. 앞으로 결혼식을 어떻게 준비할지 진지하게 얘기하게 되겠구나. 정말 '약혼'을 한 사이구나.


상징은 대단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 속삭여주는 것도 물론 행복하고 좋은 일이지만, 너와 결혼할 거라고 노래 부르듯 말하는 것도 물론 감미롭지만, 물성이 주는 약속의 감각은 또 색다르다. 이 반지가 너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 반지가 너의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는 걸 증명해준다. 반지가 갖는 상징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의무적으로나마(?) 하는 '프러포즈'가 갖는 상징도 있다. 아무도 우리의 작은 세레머니를 본 사람은 없었지만, 그날의 맑은 공기와 하늘에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와 밤을 밝히는 오렌지색 가로등이 증인이 돼준 것만 같았다.


The One With The Proposal Part II" - Episode 25 - Aired 05/18/2000 - NBC—NBC via Getty Images

미국 국민 드라마였던 '프렌즈'에서 모니카가 챈들러에게 프러포즈하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눈물이 난다.

이제는 내 머릿속에 '프렌즈'의 그 장면보다 짝꿍이 내게 프러포즈하는 장면이 되풀이된다. 정작 받을 당시에는 나지 않았던 눈물이, 그날을 회상하면서 눈가에 차오른다.


빅토리아 데이에 프러포즈를 하기로 마음먹은 짝꿍은 또 구구절절 왜 이 날인지를 설명해주었다. 우리 둘 다 기념일 기억하는 덴 영 젬병이니까 기념일을 한군데 모으려고 했다는 게 이유였다. 오죽하면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날도 처음 만난 캐나다 노동절 날짜랑 동일하게 맞추자고 했다가, 둘 다 처음 만난 날짜를 9월 1일이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그냥 그날이 되어버렸다. 참고로 처음 만난 캐나다 노동절은 2019년 9월 2일이었고, 정식으로 연애를 시작한 날짜는 2020년 9월 1일이다. 노동절은 매년 바뀌니까, 기억하기 좋게 9월 1일로 고정시켜버렸다.

빅토리아 데이 역시 매년 바뀐다는 걸 나중에 생각해냈는데, 다행히도(?) 내 동생의 생일이기도 한 날이라 기억 못 할 수 없을 것 같다. 프러포즈 받은 날도 기념일로 쳐야 하는 건진 몰랐지만.

아마도 결혼식도 이런 비슷한 날짜 중에 정해지지 않을까, 기억하기 쉽게?


아무튼 얼떨결에 이렇게, 약혼을 했다!





Copyright. 2022. 희연. All Rights Reserved.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