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코로나 시대의 캐나다살이
32. 코로나 시대의 캐나다살이
2019년 12월. 캐나다에서의 첫 학기가 끝이 나고 종강의 기쁨을 누리기도 채 전에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2주가량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겨울 방학을 즐기기에 알맞을 것 같았고, 또 부모님을 만나고 친구들이랑 회포를 풀기에 적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의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한국에 있는 2주간, 의미심장한 뉴스를 봤던 기억이 난다. 그냥 SNS에 떠도는 괴담 정도로 치부했었다. 중국의 어떤 지역에서 길거리에 가만히 서 있던 사람이 별안간 쓰러지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는 동영상이었는데, 쓰러진 사람을 줌 아웃하며 거리를 비추니 더 많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하도 가짜 영상이 판을 치니, 그것도 조작이겠거니, 라고 가볍게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왔는데 한국에서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심상치 않게 들려왔다. 확진자 한 명이 규칙을 지키지 않고 온갖 군데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며 감염병이 일파만파 퍼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미, 캐나다에서는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뉴스조차도 잠잠했다. 어딘가에 확진자가 나왔다더라, 중국인이라더라, 하는 흉흉한 소문만 돌았다. 학교 내에서 병의 존재를 알음알음 알게 된 몇몇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인종차별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동양인들의 미묘한 눈치 게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조금 둔한 나는 별생각 없이 마스크도 잘 착용하지 않고 다니곤 했다. 그러다가 격리 조치가 시작되었다.
3월 13일, 금요일. (하필이면 13일의 금요일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카페테리아에서 삼삼오오 모여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하교 조치가 내려졌다. 자세한 안내가 없이 귀가하라는 얘기만 들었는데, 락다운, 봉쇄령이 시작될 것이라는 조짐이 있었다. 혹시 몰라 귀가했다가 마트에 들러 한동안 먹을 것들을 잔뜩 쟁여왔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의 느닷없는 휴식이 이어졌다.
학교 수업은, 당시엔 '온라인 강의'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도 한 1~2주 내로 잠잠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조금 있었는데,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이 된다는 공고가 내려왔다. 공항을 폐쇄하고 사람들의 출입국을 통제할 예정이었고, 필수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집 밖을 벗어나지 말라는 안내도 있었다.
두 번째 학기인 1월 학기는 절반은 온라인 수업으로 마무리가 되었고, 5월 학기는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될 거라는 공지 메일이 떨어지자, 휴학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번 기회에 한국에 갔다 오는 게 났겠다는 사람도 꽤 많았지만, 나에겐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휴학은 사치였다.
그렇게 세 번째 학기인 5월 학기와 마지막 학기인 9월 학기까지 모두 온라인 수업으로 마치고 졸업을 했는데, 그 사이 코로나의 기세는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2022년 8월 현재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는 '마스크 필수' 조치가 해제되었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입장할 수 있게 되었고 대중교통 이용도 마스크 없이 가능해졌다. 백신 미접종자에게도 제한했던 서비스들도 이제는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도 제공되기 시작했다.
2020년 3월부터 2022년 8월까지, 2년하고도 5개월. 그사이 나는 백신을 2차까지 접종 완료했고 코로나에도 두 번은 걸렸다가 회복을 했다.
첫 번째 감염은 2021년 1월이었다. 학교 졸업 직후, 당시의 짝꿍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던 시기였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이 나는데, 어느 일요일 밤, 두통이 심하다면서도 컴퓨터 게임을 새벽까지 하던 짝꿍을 내버려 두고 혼자 먼저 자고 월요일 오전에 일어나 일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운이 좋게도 취직 처가 이미 정해진 덕분에 아무런 부담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짝꿍은 월요일에 출근을 못 하고 반나절을 끙끙 앓았다.
저녁이 다 되어 정신을 차린 짝꿍은, 함께 근무하던 동료 중 한 명이 코비드 확진자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알려주었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확진자의 밀접 접촉자이자, 추가 확진 의심자인 짝꿍과 한 공간에 있던 나도 안전할 수 없었다.
짝꿍은 다음 날 PCR 테스트를 받아 양성을 확인했는데, 검사를 해주던 의사가 "증상이 있으면 검사받으러 나오지 말고 집에서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며 혼을 냈다고 했다. 온타리오 보건 당국이 확진자와 밀접 접촉자로 분류된 나에게도 전화를 걸어 같은 말을 했다. 밀접 접촉자니 혹시 증상이 발현되었다면 검사를 받지 말고 무조건 자가 격리 10일을 하라고.
그 당시 코로나 자가 격리 규정은 '증상이 발현된 날로부터 10일, 추가로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면 그때부터 다시 10일, 새로운 증상이 더 나타나지 않으면 자가 격리는 자동으로 해제되고 직장이나 기타 기관에서 요청하지 않는 한 따로 PCR 테스트를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수요일 저녁부터 증상이 시작되었고, 조금 지독한 독감 정도의 증상이었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시간은 밤에 찾아왔다. 도저히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보다는 자다가 갑자기 호흡 곤란이 와서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공포가 가장 심했다. 이렇게 낯선 땅에서 엄마랑 아빠도 못 보고 갑자기 죽어버리면 나는 어떡하지? 이제야 행복한 삶이 시작될 것만 같았는데, 억울해서 어떡하지? 아파서 죽으면 어떡하지?
공포감은 3일 내내 독감 증세와 함께 이어졌고, 증세가 조금 완화되면서 공포도 사그라들었다. 착실히 열흘을 자가 격리하고서, 다행히도 첫 출근 전에 자가 격리가 끝이 났으며 무사히 출근을 할 수 있었다. 단, 후각과 미각이 사라진 증상은 두 달은 더 이어졌는데 석 달째 되니 서서히 돌아왔다.
두 번째 감염은 2022년 7월 4일이었다. 목이 간질간질하고 감기 기운이 돌았는데, 대충 냉방병 정도로 치부하고는 출근을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 점심시간에 드럭스토어에 가서 코로나 간이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음성 반응이 나왔다.
그런데 감기 기운은 떨어질 기미가 없고 온몸이 힘이 쭉쭉 빠져서는, 화요일엔 드럭스토어에서 받아온 자가 검진 키트로 집에서 다시 한번 코로나 검사를 했다. 또다시 음성이었기 때문에 코로나는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
컨디션 난조로 두 번 정도는 재택근무를 했고 세 번 정도는 출근을 했는데, 금요일이 되어서도 감기가 떨어지질 않았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코로나 자가 검사 키트는 '음성'이라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토요일에 토론토 한인 페미니스트 모임이 있어서 참가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자가 검사도 그렇고 드럭스토어에서도 그렇고 자꾸만 "음성"이라고 하니까 단순한 냉방병이라는 확신에, 그리고 한 달 한 번 만나는 모임인데 빠지고 싶지 않다는 욕심에 다녀왔다.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놀다가 귀가했고, 사건은 그다음 날, 일요일 저녁에 터졌다.
피앙세가 뜬금없이 "머리가 멍하다"며 코로나 검사를 해봐야겠다고 선언했다.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디선가 언뜻, 걸리고 일주일 후에나 양성 결과가 떴다더라는 SNS의 어떤 글을 봤던 것 같기도 했고, 혹시나 해서 나도 함께 다시 자가 검사 키트로 검사를 시도했다.
아뿔싸. 너무나도 선명한 두 줄. 둘 다 양성이었다. 하루 만에 음성이 양성으로 탈바꿈하는 사태도 발생하는구나. 당장에 토요일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렸고 회사에도 알렸다. 회사는 5일 자가 격리하며 재택근무를 지시했고, 이쯤엔 온타리오주의 확진 시 자가 격리 규정도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사실 일요일에 양성 결과를 확인했을 때 내 컨디션은 가래가 약간 끼는 것 외엔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 회복이 되어있었는데, 재택근무를 할 수 있던 것은 좀 꿀 같았다.
처음 코로나에 걸렸을 때와 달리 두 번째는 코로나가 아니라는 생각에 아무런 공포감 없이 보낼 수 있었던 덕분에 좀 더 빠르게 회복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처음 걸린 이후로 백신 접종을 받기도 했고, 여러 변이를 거친 연약한 바이러스에 걸린 덕분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직은 젊고 건강해서 바이러스와 싸울 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아직도 코로나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고, 코로나와 함께 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마스크를 필수로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부 지침이 있지만, 그래도 공공장소나 사람들 많은 밀폐된 공간에 들어갈 때는 마스크를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는지 이제는 곳곳에서 마스크 없이 활보하는 사람이 꽤 늘었다. 마치 코로나도 끝난 것처럼.
아마 코로나의 '종식'은 요원할 것이다. 매년 유행하는 독감의 종류에 코로나가 새롭게 추가될 뿐이겠지.
초기에는 한국의 코로나 방역이 부러웠었다. 캐나다에서는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확진자, 밀접 접촉자의 동선을 확인하며 관리하지 않았으니, 확산 속도가 더 빨랐다. 한국에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간간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한국에 가나 캐나다에 있으나 집에만 있어야 하는 건 같은 상황이니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비행기에 몸을 싣지 않기로 했다.
아직까지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코로나에 걸린 적이 없으시고, 세 차례의 백신을 모두 접종하셨다고 했다.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나도 두 번의 코로나를 다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코로나 시대에 캐나다에서 사는 이야기는 아마 풀어도 풀어도 계속 나오겠지만, 일단은 코로나에 걸린 두 번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디에 계시든 다들 코로나 안 걸리시고 건강하면 좋겠다. 걸리더라도 약하고 빠르게 지나가시기를 바라며.
Copyright. 2022. 희연.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