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33. 캐나다에서의 첫 직장

by 희연

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33. 캐나다에서의 첫 직장


2020년 12월, 1년 6개월 간 이어진 4학기의 과정이 모두 끝이 났다.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던 코로나가 기온이 떨어지며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기말고사를 마치고 성적이 나오기 전, 한숨을 돌리기도 채 전에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퍽 즐겁지 않았다. 초조했다. 동시에 졸업 후에 받을 수 있는 취업 비자, PGWP (Post Graduate Work Permit)를 신청했는데 잘 한 일이 맞는지 걱정도 되었다.

PGWP는 졸업 직후 180일 이내에 신청이 가능했고, 2년 이상의 교육 과정을 수료하면 최대 3년 유효한 비자가 발급된다. 취업 후 경력을 보태 이민을 준비하던 나에게는 취업 비자가 유효한 3년 이내에 최소 경력 1년을 채우고 공인 영어 성적을 만든 뒤에 영주권을 지원할 수 있었는데, 이게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크게 곤욕을 치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3년 이내에 최소 1년의 경력을 만드는 게 얼핏 어려울 일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내가 이미 만으로 서른 살이 넘어 영주권 지원 시에 나이 점수가 많이 깎이기 시작했다는 것,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일한 경력으로 그 점수를 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큰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2020년 3월부터 캐나다를 강타한 코로나의 여파로, 다니던 직장에서조차 짤리는 사람이 속출한 와중에 경력도 없는 외국인 노동자가 직장을 찾기란 험난하고 퍅퍅해 보였다. 이러다가 3년 이내에 1년 이상의 경력은 커녕 직장 조차 제대로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그대로 한국에 돌아가게 될지도 몰랐다.


문제는 또 있었다. 나의 눈이 낮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캐나다까지 왔는데, 그래도 내가 4년제 대학도 졸업을 했고 또 캐나다에서도 전문학사를 땄는데, 그리고 성적도 좋았는데. 최저시급이 조금 넘는 정도의 급여로는 도무지 만족을 할 수가 없었다. 2020년 12월/2021년 1월 당시, 내가 공부한 전공을 졸업해서 갈 수 있던 두 가지 진로 모두 신입으로 입사할 경우에 시급으로 15불~16불 정도 선이 보통이었다. 한화로 대충 환산했을 때, 시간당 만오천 원에서 만육천 원정도. 나쁘지 않은 조건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 세금을 떼고 나면 대략 시간당 14불 선이 된다. 나는 여기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낸데!* 더 받을 수도 있는데 여기서 만족할 수 없지. 게다가 난 나이도 있는걸.

(*내가 낸데: '내가 나인데'의 경상도 사투리. '나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하고 스스로를 추켜세우는 표현.)


나의 부족한 생각에, 서른한 살은 시급 14불에 안분지족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다. 캐나다에 와서까지 남들과 비교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해서 쭉 일한 동갑내기 친구들, 석사나 박사를 따고서 취업시장에 갓 나온 친구들과 나를 비교해가면서 나의 위치를 자꾸만 가늠했다. 그래도 이 나이 정도 되면 더 받아야 하지 않겠어? 나의 눈은 너무 높아서 엔트리 포지션(Entry Position: 신입, 각 업계에 발을 딛기 위해 가질 수 있는 첫 직위)으로 쉬이 만족이 되지 않았다.

그러는 반면에 이성은 엔트리 포지션으로 방향을 착실히 설정했다. 나이는 나이대로 먹었어도, 진로로 정한 업계에서는 어떠한 경력도 없는 외국인이라는 지위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코로나 상황 탓에 학교에서 주어지는 코업(Co-op: 졸업 전 인턴십으로 기업에서 단기간 일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의 기회도 마다하고 빠르게 졸업하는 바람에 경력란을 훨씬 휑한 것도 한몫했다.


이력서 쓰기, 그리고 일단 지원하고 보기.


일단은 무엇이든 지원을 하고 봐야겠다, 뭐가 됐든 간에 시작을 해야겠어.

그렇게 마음을 먹고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던져넣었다.


세네카에서는 졸업 학기 때가 되면 취업을 위한 다양한 무료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꼭 졸업 학기에만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졸업 학기가 되기 전까지는 알아서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다. 이력서 작성하기 및 첨삭, 모의 면접은 물론이고 진로 고민이 끝나지 않은 학생들을 위한 진로 탐색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리고 학교 취업 게시판에는 인턴십 기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인 공고가 올라오는데 꽤 알짜 공고가 올라오는 편이었다.

학비가 이만저만 비싼 게 아니었으니 가능한 모든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면접 특강이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내가 들었던 시간에 함께 들은 학생이 열 명이 채 되지 않아 모두 한 번씩 돌아가며 모의 면접에 참가할 수 있는 부담스러운 기회도 있었다.


선생님의 추천 메일


약 서른 군데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조차 없는 괴로운 시간들이 퍽 더디게 흘렀다. 정말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지원을 하지 않았던 한국계 회사가 몇 군데 남아있었는데, 초조함이 극에 다다르니 그조차 지원을 안할 수가 없었다. 면접을 보러 오라 한다면 경험 삼아 면접이나 보겠다는 심정으로, 면접조차 부르지 않는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중 한 군데에서, 12월 31일에 면접을 볼 수 있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면접 날짜가 정해지고 나서도 갈지 말지를 수차례 고민했다. 그리고 면접을 보러 가기로 한 날까지도 지원한 다른 곳에서 연락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일단은 면접을 보기로 결정했다.

회사는 사업을 시작한 지 일 년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곳이었다. 제대로 된 사무실이 없어 고객사의 사무실 한구석의 책상 몇 개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내 직속 상사가 되는 P 이사는 하필 한국에 가 계셔서 다른 팀의 K 이사와 단둘이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은 엉망이었다. 면접을 봐준 K 이사는 내 직무가 무엇인지, 어떤 것을 중점으로 질문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시는 것 같았다. 게다가 캐나다 회사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질문, 나이는 몇인지, 결혼은 했는지, 혹시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그만둘 생각도 있는지 따위를 물어봤다. 분노하기보다는 허탈함에 허허 웃음이 났다. 이걸로는 면접 연습조차도 되지 않을 것 같았고, 나를 뽑아준다고 해도 정말 여기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 촉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면접을 본 저 K 이사는 나를 퍽 마음에 들어하시는구나, 본인과 같이 직접 부딪히며 일하진 않더라도 나를 추천하고 싶어하시겠구나. 우습게도 한국에서 바텐더로 일할 때 몸에 밴 습관이 한국인-중/장년 남자를 상대하며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해의 들뜬 분위기가 살포시 가라앉은 1월 둘째 주에,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냐는 전화가 왔다.


이대로 괜찮을까, 캐나다에서 일하는 첫 직장인데 한국인들로만 가득 찬 한국계 회사인데다가 규모도 코딱지만하고 맡을 업무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파악이 안 되는 이 일로 내 커리어를 시작해도 될까?

불확실한 미래로 흔들리는 마음은 불안에 불씨를 지피기에 충분했다. 이력서를 넣은 다른 곳에서 연락이 오지 않은 것도 불안의 불씨에 부채질을 했다.


일단 시작해보자. 뭐라도 캐나다 내에서 경력이 있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 그리고 취업준비 이제 지겨워!

겨우 한 달 남짓 되는 시간이었지만 나의 불안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했기에, 나는 덜컥 취업 제안에 승낙을 하고 말았다. 2주 후, P 이사가 캐나다로 돌아오는 시점에 첫 출근을 약속했다.


첫 회사는 엉망이었다. 체계는 하나도 잡혀있지 않았고 인수인계를 해줘야 할 P 이사는 회사에 잘 나오지도 않았다. 주먹구구식으로 되는대로 주어진 일을 하나하나씩 혼자 습득해나가는 날들이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일들이 어떤 소용이었는지를 고민하는 날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급여가 꼬박꼬박 나온다는 것이 꽤 위안이었다.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가 다른 엔트리 포지션의 직업보다 급여가 아주 조금 나은 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봐야 1~2불 차이였지만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주는 데는 충분했다.


그리고 캐나다에서의 첫 직장생활은 약 9개월 반 만에 모종의 사건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고정 급여는 안정감을 가져온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나는 취업 준비라는 기간을 너무 두려워했다. 능력은 안 되는데 콧대만 높았고, 그러면서도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게으름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눈을 낮춰 한국계 회사에 취업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자괴감에 빠져 출근이 괴로울 줄 알았는데, 고정 급여가 주는 안정감은 의외로 마음의 평정을 쉽게 가져다 주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어떻게든 다음 단계의 길이 분명 보이니까. 당장 눈앞의 먹고살 것이 걱정되어 무작정 내린 결정이어도 그 길을 따라가면 그다음이 분명 보인다. 설령 잘못 든 길인 것 같더라도 때 되면 들어오는 급여는 내가 디딘 땅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을 보태준다.


지금은 두 번의 이직을 거쳐 캐나다계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이 이직과 이직의 스토리는 다음 기회에 또 풀어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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