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나이아가라에서 번뇌야 가라
34. 나이아가라에서 번뇌야 가라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하고 물어보면 나는 망설임 없이 '바다'라고 한다. 우울해지거나 쓸쓸해지는 날이면, 혹은 기념할 만한 일이 있다 싶으면 대번에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바다가 보이는 풍경에서 나고 자랐으니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했다. 전 남자친구였던 A는 그런 내게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말을 했다. 한창 우울증을 앓던 때니까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반발심을 지울 수는 없었다.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거랑 내 우울증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거든? 그저 바다를 좋아하는 내가 또 그저 우연히 우울증을 앓을 뿐이야! 그런데 이제는 그가 똑같은 말을 한다면 딱히 반발심이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다가 덜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토론토에 오기로 결정하고서 했던 걱정들 중 가장 큰 걱정이 '근처에 바다가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
캐나다 = 자연, 이런 수식을 편견처럼 갖고 있었는데 사실 토론토 도시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자연과 가깝진 않았다. 내 기대에 못 미칠 뿐이지 사실 공원 시설도 잘되어 있고, 대로변을 벗어나면 한적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자연에 어우러지는 것 같은 주택가가 펼쳐지니까 퍽 나쁘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아니 두 가지가 토론토에는 없었다. 바로 산과 바다였다.
한국은 서울 같은 대도시에도 산이 있다. 내 고향 거제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말 그대로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고, 서울의 대표적인 데이트 명소가 남산이라고 하고. 교과서에서 '국토 면적의 70%는 산림'이라는 것은 실생활에서 느낄 정도다.
그런데 토론토는, 그 근교 어디에도 바다는 고사하고(내륙이니까 당연하지만서도), 산이라고 부를만한 산이 없다. 차를 타고 한 두 시간 가면 무슨 무슨 봉우리도 있고 그 숲길이 잘 되어 있어서 가지각색의 트레일도 산재하는데, '등산'을 할 만한 산은 전무하다.
산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풍경 속에 산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생경해질지는 몰랐다. 그래도 봄이면 신록이 올라오고, 여름이면 푸르름을 자랑하다가 가을에 울긋불긋 물드는 숲, 공원이 어디에나 있으니까 산이 없다는 것은 그럭저럭 참아줄 만하다.
그러니까 역시 문제는 '바다'가 없다는 것이었다. 바다에 견줄만한 호수라고 여러 군데를 가 봤지만, 바닷물이 아닌 민물이라는 생각에 영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토론토의 명물이라는 나이아가라 폭포라면 다르지 않을까?
첫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은 2019년 10월이었다. 학교에서 유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토론토를 중심으로 각종 관광지로 향하는 투어 프로그램이 거의 매주 있었는데, 내 주머니 사정과 주말 스케쥴을 고려했을 때 딱 알맞은 날짜가 있어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아침 일찍 학교에서 모여 관광버스를 타고 와이너리에 들렀다가 나이아가라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폭포 관광을 한 후 저녁쯤 돌아오는 당일치기 일정이었다.
소풍 가는 아이의 마음으로 설렘을 가득 안고 나이아가라를 향해 단체로 떠났다.
버스 안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로 가득 찼다. 70 퍼센트가 인도계 학생들이고 유럽에서 온 단기 유학생이나 동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도 간간이 있었다. 유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니만큼 가는 버스 안에서 서로 친해질 수 있도록 각종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원래도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워하는 나에게는 고역 같은 시간이었다. 결국 누구와도 말을 나눠보지 못한 채 버스는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와이너리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기회와 포도밭에서 자신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오랜만에 탁 트인 풍경의 포도밭을 보니 워킹홀리데이로 갔던 호주에서 우연한 기회로 와인이 될 포도를 땄던 때도 생각이 났다. 벌써 5년도 더 전이지만, 어쩐지 나는 그때보다 한 뼘도 더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듯, 와인을 사랑하는 내가 와이너리를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다. 나이아가라의 명물이라는 아이스 와인 한 병을 구입했고, 한국으로 가져가서 부모님께 드려야겠다는 제법 효녀 같은 생각도 했다.
다시 삼십여 분 버스를 타고 나이아가라에 도착했다. 온 김에 할 수 있는 건 다 하자는 마음으로, 배를 타고 폭포 아래까지 가는 어트랙션도 해보았고, 또 폭포의 시작지점까지 걸어가 물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기까지 했다.
배를 타고 폭포의 아래까지 갈 때는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폭포수 세례로 눈조차 뜨기 어려웠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분명 타기 전에 나눠준 우비를 입었는데도 우비의 틈새로 들어간 물 때문에 신발과 옷이 푹 젖을 정도였다.
폭포의 시작 지점은 더욱더 혼란이었다. 엄청난 양의 물이 절벽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성적으로는, 손끝이라도 물에 닿으면 그대로 휩쓸려 떨어질 거라는 걸 알지만, 홀린 듯이 손을 뻗어 몸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매우 어지러웠다.
바다에 가면 해변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와 다시 쓸려가는 파도, 먼발치의 해안선과 맞닿은 하늘, 그리고 비릿한 냄새에 한껏 취한다. 파도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도 생각했다가, 인간관계란 원래 이렇게 파도 같아서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는 거지, 하는 철학적인 생각도 했다가, 또 파도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번뇌를 함께 쓸려 보내기도 했다. 생각을 버리기도 했고 또 다른 생각을 주워 오기도 했다.
폭포 앞에서는, 그러니까 아주 거대한 폭포를 앞에 두고는 그런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일정한 박자와 리듬과 멜로디를 만들며 우아하게 요동치는 파도와 달리, 폭포는 그저 콰콰콰콰 쏟아지기만 했다. 물론 폭포에도 박자와 리듬은 있었는데, 인간이 즐길 수 있을 만한 우아함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귓전을 때리는 소음과 온 얼굴에 흩날리는 물방울은 그 어떤 고민과 생각도 무용으로 만들었다.
여러가지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확실히 나는 캐나다에 오고 나서 우울증이 많이 호전되었다. 의사에게 완치 판정을 받지는 않았지만,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우울과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또 밤새도록 걱정거리 한가득 안고 뒤척거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따금 우울감을 느낄 때, 기분 전환으로 하는 모든 것들은 빠르게 효과를 보였다. 남들은 다 느낀다는 겨울의 계절성 우울도 스쳐 지나가긴 해도 내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바다가 없다는 것이 이유가 되진 않을 것이다. 다만 바다를 갈 때마다 했던 번뇌, 아니 번뇌가 있을 때마다 바다를 가곤 했던 습관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고민거리가 생기면 감정을 담지 않는 법을 익혔다. 걱정거리가 있어도 해결책을 빠르게 찾아보고, 당장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걱정을 멈추는 법에 익숙해졌다. 단지 '캐나다에 왔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바다가 없는 것이 내 우울을 멈춘 것이 아니듯이.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내게 쌓여온 경험들이 이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세 번째 갔을 때쯤,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이, 내 생각도 머리에서 발끝으로 떨어뜨리면 나의 마음은 불안과 우울에 흔들릴 일이 없다. 단번에 되는 일은 없으니까 매일 조금씩 훈련해야 한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나는 평생을 우울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 할때에도 포기하지 말고 번뇌를 발바닥으로 보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언젠가는 내 발밑에 아주 단단한 땅이 생겨, 흔들리려 할 때마다 나를 꽉 붙들어 주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이아가라 폭포는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작은 바람은, 그냥 좀 큰 폭포가 있는 관광지 정도로만 남는 건 아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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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간 소식 ***
안녕하세요, 브런치 구독자 여러분.
캐나다 이민 에세이와 책 리뷰를 주로 올리며 브런치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희연입니다.
한동안 브런치에는 소설을 써서 올리지 않았기에 이 출간 소식이 조금 뜬금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난 한 해 동안 두 작가분들과 함께 쓴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출판사, 이프북스에서 진행한 '쓰는 여자'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한 글쓰기가 출간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 것이 참 뿌듯하네요.
오랫동안 소설을 써왔지만 정식 출판까지 이어진 것은 처음이라 참 감개무량합니다.
책 제목은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공주 이야기>로, 저는 첫 번째 이야기 '인어와 공주'를 집필하였습니다.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공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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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출간은 11월이고 현재는 텀블벅 펀딩이 진행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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