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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Nov 30. 2022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 정세랑

여행으로 인류애 회복하기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요즘처럼 지구의 미래가 걱정되는 때도 없을 것 같다. 전염병이 창궐하고, 추워져야 할 겨울 초입이 미적지근하다 못해 따듯하기까지 하다. 세계 곳곳에 홍수나 산불이 났다는 뉴스가 너무 자주 나와서 이제는 자연재해에도 무뎌진 기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들이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는 생각을 좀체 떨칠 수가 없다. 지긋지긋한 인간들, 이제는 인구가 80억 명을 넘었다지.

그런 걱정을 한가득 품고 사는 요즘에 읽은 정세랑의 여행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는 그래서 귀하게 읽었다. 정세랑 작가가 여행한 도시들 속에서 지구를 사랑하는, 지구인을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SF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지구인'이라고 부르는 여행책이라니. 마치 지구 사랑하기 대결을 외계인이랑 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책을 읽으며 서서히 어색함이 사라졌다. 그렇지, 나는 지구인이고 나도 지구를 참 사랑해.


P. 226. 세상이 망가지는 속도가 무서워도, 고치려는 사람들 역시 쉬지 않는다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절망이 언제나 가장 쉬운 감정인 듯싶어, 책임감 있는 성인에게 어울리진 않는다고 판단했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된 변화가 확산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패턴이기 때문에 시선을 멀리 던진다. 합리성과 이타성, 전환과 전복을 믿고 있다. 우리는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사는 종이 아니니까.


정세랑의 이런 낙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이따금 절망이 먼저 찾아와도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며 그래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 노력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리곤 했는데, 이렇게 근사한 표현으로, 단호하게 '판단했다'고 쓰는 작가에게 다시 한번 반했다.

함께 읽던 책은 <에코 페미니즘>인데 무려 30년 전에 초판이 발행된 책을 읽으며 여러모로 마음이 답답했다. 30년 전에도 이미(아니 그보다도 더 전부터도 아마) 자본주의가 과도한 개발을 부추겨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세상이 나아지긴커녕 더 나빠지기만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30년 전에 <에코 페미니즘>을 쓴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가 있다면, 지금은 그레타 툰베리가 있고 또 각자의 자리에서 꾸준히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조금씩 나아지고 있겠지, 조금은 더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겠지. 그런 믿음은 언젠가 화답을 받을 것이다.


이 책은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을 뿐 아니라, 지금껏 생각해 본 적 없던 화두도 함께 던져주고 있었다. 왜 세계 문학상은 항상 서구의 것이었는가? 아시아 문학이 상을 적게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서구의 문학상이 '세계 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이 되고, 그렇게 유명해진 문학만이 주목을 받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팔리는' 책을 출판해서 돈을 벌어야 하니, 문학상으로 검증되지 않은 외국의 서적들을 들여와 번역해 출간하는 것은 도전이자 모험이며 위험성이 큰 사업일 것이다. 또한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니 가장 확실한 것에 투자를 하는 것이 현명하기도 할 테고.

그렇지만 이야기는 북미나 유럽에서만 쓰이고 읽히는 것이 아니다. 아시아에는 아시아의 이야기가,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의 이야기가 있다.


대학에 다닐 때 아프리카의 문학 읽기라는 교양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다지 인기 있는 교양 과목은 아니었지만, 아프리카라는 미지의 대륙에, 그리고 그 대륙에선 어떤 문학이 있을지 궁금했던 나의 알량한 호기심에, 항상 수업 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의 보조도 자처하며 수업을 들었다. 우습게도 지금은 아무것도 머리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아프리카 문학인 누구누구 이름을 들으면, "아, 나 들어 본 적 있어." 정도의 말은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수업을 들을 때에도 겪었던 어려움 중 하나는 아프리카의 문학은 자료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유의미하게 자료의 양이 늘어났을 것 같진 않다. '한국어로 된' 아프리카 문학 자료가 적었다는 것이지, 아마 영어나 프랑스어로 된 자료는 한국어로 된 자료보다는 더 많았을 것이다. 그나마 영어나 프랑스어로 된 아프리카의 문학 작품은 한국어로 번역이 가능하기라도 하지, 아프리카 토착어로 된 문학 작품 중에 번역을 할 생각조차 못한 작품은 또 얼마나 많을까.

아프리카라고 하니 먼 나라 같고 그다지 효용성을 못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아시아는 어떨까? 우리는 같은 아시아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아시아의 문학을 누리고 살고 있을까?

일본 문학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겠지. 이웃 나라기도 하고 일-한 번역 시장은 비교적 잘 굴러가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중국 문학은 어떤가? 베트남 문학은?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대만, 그리고 인도 문학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베트남 소설가를 알고 태국의 시를 읽었으며 캄보디아의 에세이를 접해봤을까? 그런 기회가 있긴 했을까? 이들 나라의 작품 중 세계 유수의 문학상을 탄 작품이라면 국내에도 번역, 출간이 되었겠지만, 그런 작품이 얼마나 되겠는가.


P. 299.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직접 항로들이다. 그리고 그 굴절되지 않은 길들을 아끼고 우선시하는 일이다. 아시아인으로서 아시아를 더 열렬히 사랑하고 싶다.


작가의 열망을 어느새 공유하게 되었다. 지구인들이 지구를 사랑하는 만큼, 아시아인들이 아시아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지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은 구절구절에 나의 마음이 이렇노라고, 당신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닮아 있노라고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던 만큼, '그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겠습니다.'라고 할 만한 부분도 있었다. 어쩐지 정세랑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더 귀 기울여 들어줄 것만 같아서 조금 더 아껴두었다가 만날 기회가 생겼을 때 말해주고 싶었다.


정세랑 작가의 작품, <보건교사 안은영>과 <피프티 피플>, 그리고 <시선으로부터,>를 모두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앞으로 나올 그의 작품을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오래오래 지치지 말고 다정한 글을 많이 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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