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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Dec 23. 2022

에코페미니즘 -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에코페미니즘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다양한 종류의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었다. 어쨌든 퀴어,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정체화한 이후로 퀴어+페미니즘의 이론은 얼추 안다고 생각했고, 비건인 친구와 함께 살았을 적이 삶의 한 축이 된 후로는 에코+페미니즘을 고민하기도 했다.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가 미처 실천을 못하고 있었는데, 벌써 3년차에 이른 독서모임 덕분에 이 어려운 책도 완독을 해냈다. (완독의 집착을 아직도 못 버렸지만.)

책 한 권을 다 읽었다고 해서 에코+페미니즘을 이해했냐면, 그건 섣불리 대답하기 어렵다. 책의 내용이 워낙 어렵기도 했고, 사뭇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쿡쿡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해가 되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들을 골라서 내 마음에 새겨보기로 했다.


1. 현재의 경제 지표가 보지 못하는 것.

P. 21. GDP라는 형태로 성장을 계산하는 데 이용되는 국가회계체계는 생산자가 자신이 생산한 것을 소비하면, 그것은 생산의 경계 바깥에 있게 되므로, 사실상 전혀 생산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전제를 기초로 하고 있다. 생산이라는 경계는, 그 적용범위에서 재상하거나 재생될 수 있는 부분을 생산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적 산물이다. 따라서 자신의 가족, 아이, 공동체, 사회를 위해서 생산하는 여성들은 모두 '비생산적'이며, '경제적으로 비활성화된' 부분이다. 경졔를 시장 안에서만 제한해놓고 보면, 경제적으로 자족한 상태는 경제가 없는 상태로 보인다. 여성의 노동이나 제3세계 자급경제에서 행해진 노동의 가치가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자본주의 가부장제에 의해 구축된 생산의 경계가 낳은 당연한 결과물이다.

고등학교 사회과 과목 중, '경제'는 내게 늘 어려웠다. 지표들이 지시하는 것들은 명확했고, 어떤 수치가 경제적으로 계산되는지도 확실했지만, 세상을 이런 숫자들로만 바라보는 것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가르치지 않았다. 아마 내가 고등학생 때 <에코페미니즘>을 읽었더라면, 경제 과목이 더더욱 어렵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돈을 벌지 않는 노동을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는 세계에서, 여성의 가사노동은 '경제적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런 관점과 가부장제가 결합이 된 세상이 바로 지금의 세상이다. 가사노동 및 돌봄노동의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돈을 많이 버는 것, 부를 축척하는 것만이 최고로 여겨지는 세상. 그리하여 내가 누리는 것이 착취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

지금까지도 무보수 무임금으로 행해지는 가사노동 및 돌봄노동, 그리고 자급자족하는 생산노동을 수치화해서 경제 지표로 삼는 기준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회과학 연구자가 아니니까, 일단 내가 지금 아는 선에서는.) 그렇다고 해서 이런 노동들을 수치화하는 것이 지금의 세계 경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2. 여성도 여성을 착취하는 세상

P. 378. 여성착취야말로 페미니스트 비판가들이 염려하는 바로서, 특히 부유한 중산층에 의해 빈민여성들이 착취당할 수 있으며 나아가 '번식자 여성'이란 새로운 계금이 등장할 우려마저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 여성들이 대리모가 되거나 생식체 난자를 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삶이 온전히 나 홀로 잘 했기 때문에 원하는 누것을 리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물론 내가 노력한 부분도 있겠지만, 나에게 타고난 운, 빈민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은 운, 북의 선진국에서 태어난 운, 노동한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운이 어쩌면 더 크게 좌우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삶은 교묘한 착취 위에 쌓아 올려진 식민지 지배계급의 삶과 다르지 않다. 내가 누리는 꽤 많은 것들이 착취로 이루어져있다. 식료품 점에 가면 산처럼 쌓여있는 싱싱한 과일들과 야채, 채소들, 그리고 고기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냉동식품이나 수입식료품 역시 비교적 적은 돈을 들여 살 수 있다. 공산품은 또 어떠한가. 변기에 버려지는 것으로 목적을 다하는 휴지나, 공공장소에서 손을 닦는 데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페이퍼 타올, 또한 플라스틱 빨대나 플라스틱 빨대를 대신해서 나온 '친환경적'인 종이 빨대. 내가 미처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혹은 비용만을 지불하고서 쓰는 사소한 물건들 모두가 실은 착취의 결과물이다.

거기서 나아가 대리모 문제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브런치에서 태국인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입양한 게이 부부의 이야기를 우연히 읽었는데, 읽는 내내 눈쌀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리모에 관해서는 늘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여성의 자궁을 착취해가면서까지 보존해야할만큼 귀한 유전자가 있는가? 단순히 나와 유전형질이 비슷한 자식을 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조금 삐끗하면 우생학으로 이어지기 쉬우니 유전자 이야기는 딱 여기까지만)

인용한 구절에도 언급되었듯, 작금의 대리모는 대부분 빈곤 여성으로 결국 착취당하는 위치에 있다. '돈을 받으니 착취가 아니자 않냐'는 자본주의 논리가 대입된다고 착취가 착취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 돈을 받지 않고 선의를 베풀어 가족의 대리모가 되어주는 것은 또 괜찮을까? (실제 그런 사례도 있기도 하고) 혹은 가족이 아니더라도 오롯이 선의로만 이루어진 행위라면 용인될 수 있을까? 그러나 선의는 언제나 곡해되고 손쉽게 이용당하고 착취당하기 마련이다.


<에코페미니즘>에서 대리모에 관한 논의를 아주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가부장제 사회 내에서 발전한 생명과학과 자본주의가 결합한 대리모 '산업'을 어떻게 바라봐야할 지는 사뭇 명확해진 편이다.



3. 인구 증가가 기후 위기의 원인이라는 환상

P. 480. 인구'폭발'은 언제나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기에 근대 가부장제가 만든 이미지로 등장해왔다. 인구과잉에 대한 최근의 우려는 환경에 대한 우려와 관련되어 있다. 지구환경의 파괴에 관한 불안으로 인해 널리 퍼진 세계의 굶주린 무리들에 대한 묘사는 인구조절정책이 받아들일 만하며 심지어 부득이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수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자원을 이용할 기회가 불평등하다는 점이나 지구환경에 지우는 부담이 누구나 똑같지 않다는 점을 감춘다. 이 책의 다른 곳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지구 전체로 볼 때,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빈곤한 지역에서 인구가 아무리 급속히 줄어든다 하더라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10대 부국의 현 소비수준을 5퍼센트 줄이는 것에 못 미친다. 그러나 현재 지배적인 경제, 정치적 과제들은 그 어떤 가를 치르더라도 북의 낭비적인 '생활양식'을 보호하고자 하며,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이 지구자원에 과부하를 걸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출산은 엄격히 조절되어야 한다고 비난할 때만 고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선별전략은 여성과 어린이와 지구 사이에 인위적인 갈등을 만든다. 인구과잉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구조절계획을 통해 여성의 신체에 무자비한 침해를 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계 인구가 이제 80억명을 넘겼다고 한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숫자송'에서 60억 지구라는 구절이 유행처럼 번졌는데, 이제는 80억명이다. 그리고 무심하고 배려없던 나의 발언들이 스쳤다. 코로나가 지구를 쓸어서 인구가 한 절반 정도로 줄었으면 좋겠다던 그 발언.

재앙은 결코 평등하게 오지 않는다. 인구 폭발의 원인은 늘 개발도상국으로 화살이 돌려지고, 그런만큼 재앙도 그들에게 가장 가혹하게 다가온다. 코로나 뿐만이 아니라 기후로 인한 재앙 역시 마찬가지다. 가뭄, 홍수, 태풍 등등. 기후의 위기를 가져온 것은 무분별한 개발과 낭비적인 생활양식을 누리고자 애쓰는 부유한 국가들인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난한 나라들에게 가장 처참하게 쏟아진다.

인구가 절반정도 줄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발언에는 이러한 차이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던만큼 차별적인 생각인 것은 분명했다. 물론 아직도 인구가 줄어야 지구의 환경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기왕이면 그냥 모든 인간이 다 사라지는 편이 제일 좋겠지만.


<에코페미니즘>에서 지적한 관점은 세계 인구를 바라보는 나의 시점을 전환시켰다. 낭비적인 생활양식은 나몰라라한 채, 인구 증가만을 기후 위기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무신경함을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4. 결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에코페미니즘>에서는 대안을 콕 찝어서 제시한다. 낭비적인 생활 양식을 바꾸고, 자급적인 경제를 활성화하는 동시에 가부장적인 사회를 변화하고 자본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환경 위기와 멀어질 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실천이 가능한 부분은 어느 정도일까를 가늠하면 아득하기 그지 없다. 그런 면에서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함을 느낀 것 같다.

개인의 실천은 너무 미미해보이고 힘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런 실천이 무의미하진 않다고 믿는다. <에코페미니즘> 초판이 발행된 것이 30년 전인데, 그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은 확실히 대중의 인식이 꽤 변했다. 당시엔 대부분이 모르던, 혹은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사안들이 요즘엔 매일 미디어에 오르내리며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러면 이제 개인의 실천을 넘어 국가나 초국적 기업들의 실천이 뒤따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사태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되, 희망을 잃지 말고 해야할 일들에 집중하기. 다시 한 번 방향성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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