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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Jan 10. 2023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 케르스틴 뤼커, 우테 댄셸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케르스틴 뤼커, 우테 댄셸


세계사는 늘 내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조잘거려 주는 과목이었다. 고등학교 때 아무도 공부하지 않았던 세계사 과목을 홀로 EBS 선생님과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을 떠오려보면, 암기를 잘 못하는 탓에 성적이 썩 잘 나오진 않았어도 즐겁게 공부했던 기억 뿐이었다. 그런데도 늘 마음 속에 의문들이 자꾸 일어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남자 왕, 위인, 철학자, 과학자들은 이렇게 많은데, 여성들은? 여자 왕, 황후, 높은 자리에 오른 여자들, 위대한 업적을 이룬 여자들의 이름은 너무 적었다. 있더라도 대부분은 남성의 조력자 혹은 남자를 쥐고 흔들어 나라를 망하게 한 악녀로 호명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역사는 영어로 History라고 하고, 이걸 his + story라고 하며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비약하는 말이 있는 것도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여성'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는 세계 역사 속에서 비어있던 여성의 이야기를 채워 넣는 책이었다. 공부하듯이 달달 외우며 읽기보다는 옛날 이야기 읽듯이 호로록 읽기 좋았다. 그러면서 그동안 내게 목말라했던 비어있던 부분을 채워주기도 했다.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여성들은 큰 역할을 했고, 역사를 쓰던 '남성'들이 부던히도 그 흔적을 지우려고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P. 14. 어떤 여성이 용감하게 역사에 끼어들고자 했다면, 그녀는 모략을 일삼고 잔인하며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매우 나쁜 여자로 기록되었다. 전 세계의 역사가들이 비슷한 목적을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다. 여자가 역사에 끼어들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사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입증하려 한 것이다.

사실 기록된 역사로만 따져봐도 나라를 망하게 한 건, 전쟁을 일으키고 나쁜 짓을 저지른 건 남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데도 지도자 자리에 자꾸만 남자한테 기회를 준다. 한국에서도 여자 대통령이 한 번 당선이 되었지만, 그를 탄핵하며 "이래서 여자 대통령은 안 돼."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물론 그 여자 대통령의 범죄 사실을 옹호할 생각은 결코 없지만, 단 한 명의 여자 대통령의 실패를 모든 여성의 실패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너무 비약이지 않을까? 그렇게 치면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초대 대통령도 남자였고, 경제를 개발하겠다며 독재를 일삼은 대통령도 남자였으며, 지금도 남자 대통령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중인데, 왜 "남자는 이래서 대통령하면 안 돼"라는 말은 아무도 안 하는 것일까?

여자 한 명의 실책은 모든 여자의 실패로 기록하려고 하는 것 역시 여성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고대의 유물같은 것이다.


한편으로,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초기 모습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살필 수 있는 부분도 퍽 좋았다. 내가 아는 기독교는 항상 여성주의적이었는데 한국에서 접했던, 혹은 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아주 상반되었기 때문에 늘 반감이 있었다.

P. 166. 초기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유례없는 자유를 허락했다. 갑자기 여자들도 결혼이 아닌 다른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독교를 믿으면 여자도 읽기와 쓰기를 배우고 외국어를 익히며 성서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먼 곳으로 여행을 갈 수도 있었다.

한국에도 초창기에 기독교가 유입되었을 땐, 모든 인류의 해방과 구원을 주창했을 텐데, 양반과 상놈이라는 계급은 없고 여성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공평하게 주었을 텐데. (물론 조선시대에 유입된 기독교가 초기 기독교와는 또 거리가 있겠지만)

그렇지만 여성에게 이런 자유를 주었던 기독교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전 세계를 식민지로 삼는 만행을 저지르는 정복자로 금세 변질되고 말았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여성 학자들이 이름을 날렸던 때와 비교를 하면, 여성의 교육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소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행보를 보면 무슬림 창시자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P. 241. 시트 알물크, 아스마, 아르와의 이야기는 무슬림의 여성들도 교육을 받았고 할 수 없는 일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 세명의 여왕은 가장 유명한 사례일 뿐이다. 한 영국 학자가 여성 무슬림 학자의 이름을 세어보았더니 12세기까지 무려 8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들 중에서 파티마 알피흐리는 9세기에 대학을 설립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모로코의 알 카라윈 대학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많지 않아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정말 '근본주의'라고 불러주는 게 맞는지는 재고해보고 싶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본'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정말 종교가 시작된 시점에서 공유된 근본이 맞는 건지.


경제 사상 역시 여성을 쉽게 배제했다. 이미 상식이 되었겠지만, 현재의 경제 지표는 여성의 노동을 쉽게 배제한다. 여성의 가사 노동, 돌봄 노동은 '경제적이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어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있다는 '공산주의'를 소개한 마르크스도 그랬다. 그가 부르주아 출신의 남자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한계라고 생각했다.

P. 443. 이제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기나긴 투쟁에서 또 한 명의 위대한 사상가가 등장했다. 마르크스였다. 그러나 공장에서 수백만 노동자가 노예가 되었다고 비판하던 그 역시 여성이 집에서 추가로 무임금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다. 밥과 빨래, 청소와 육아의 노동에는 아무런 대가가 지급되지 않으며 적지 않은 남성이 아내를 노예 취급한다는 사실은 전혀 그의 정의감을 건드리지 않았단 것 같다.

노동계급에 있던 여성 중에 마르크스보다 먼저 혹은 마르크스와 비슷한 시점에서 비슷한 사상을 떠올린 이가 과연 없을까? 마르크스는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에게 발언권이 주어지고, 노동계급이 아닌 덕분에 책을 써낼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여성이었다면 가사 노동이나 돌봄 노동을 빠트리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현재는 경제 지표에 그간 도외지 되었던 가사 노동/돌봄 노동을 포함하려고 학자들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너무 오래도록 자본주의적 경제 지표에 익숙해져 버려 쉽지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여성의 참정권 투쟁 이야기를 책에서 빠트릴 수 없다.

P. 464. 여성들은 당연한 것을 요구했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착하거나 못될 수 있고, 정직하거나 거짓말할 수 있으며, 똑똑하거나 멍청할 수 있고, 남을 먼저 생각하거나 이기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자가 용기를 내서 해당 권리를 요구할 때면 오히려 남자들보다 다른 여자들이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도 그랬다. 영국 귀족 여성들이 그녀를 비웃었고 남자들에게는 '치마 입은 하이에나'라는 말까지 들었다. 빅토리아 우드헐도 그랬다. 그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 선거권을 요구하는 차원을 넘어 직접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참정권 투쟁 이야기는 참 기이하게 느껴졌다. 여성에게는 대표자를 뽑을 권리는 없지만, 여자들이 뽑지도 않은 대표자들이 모여서 만든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 대상에는 해당된다. 참 이상한 일이지, 동의한 적도 없는 법을 어겼다고 그 법에 의거해 처벌을 받다니.

어쨌든, 과거의 무수히 많은 여성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가 사람으로서의 권리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아직도 부족한 게 많지만, 페미니스트 선배들의 발자취를 떠올리며 앞으로 더 나아가고 비어있던 여성의 세계사를 채워나가면 된다.


책의 아쉬웠던 점은 역시 '서양'의 시각으로 쓰인 부분이 많다는 점이었다. 동/남 아시아의 이야기가 부족한 점, 비교적 세밀하지 못한 한계점이 분명히 보였다. 그리고 '여성 세계사'라고 하면서 기존의 남성 중심의 세계사도 분량을 꽤 많이 차지해서, 초반부에는 여성의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남성의 시각을 답습하는 서술도 남아있었는데,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정말 필자의 시각도 그러했는지는 조금 모호했지만.

아주 많이 색다르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간 세계사 속에서 조명되지 않았던 부분들을 하나씩 짚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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