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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Jan 17. 2023

가녀장의 시대 - 이슬아

가부장을 답습하는 가녀장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일간 이슬아>로 유명세를 탄 이슬아 작가의 첫 장편 소설 <가녀장의 시대>는 읽는 내내 고개를 자꾸만 갸웃하게 되었다. 작가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을 문학의 효용이라고 말하고 싶다.


1. 이것도 '장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첫째로 형식의 문제였다. 아니면 나의 편협한 정의가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장편 소설'은 한 권 이상(책 한권당 200페이지-300페이지 혹은 그 이상, 200자 원고지로는 800매 이상/ A4로는 100매 이상)으로 출간되는 책으로, 하나의 주제의식과 연속성 있는 이야기를 분량 안에 녹인 것이다. 물론 '옴니버스식 구성'이라는 장편 소설의 분류도 있다.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처럼, 각 챕터별로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펼쳐 나가지만 결국 같은 배경을 공유하는 이야기, 그러나 결국엔 하나의 커다란 줄기로 귀결되는 이야기. 나는 그런 것을 '장편 소설'로 분류했던 것 같다.

이슬아의 <가녀장의 시대>는 지금껏 내가 생각한 '장편 소설'의 틀을 깼다. 각 챕터가 길지 않기도 했고, 마치 시트콤처럼 짧고 간결하면서도 그 자체로 완결성 있는 이야기들의 모음집처럼 느껴졌다. 작가 본인의 이름을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에 그대로 썼기 때문에 에세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에 조미료를 쳐서 허구로 만들었으니 소설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이 책의 각각의 챕터는 하나의 중심 주제로 이야기가 모이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책 제목 <가녀장의 시대>자체가 중심 주제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 <가녀장의 시대> 전체를 통과하는 커다란 이야기 줄기는 보이지 않으니, 자꾸만 '이것도 장편 소설이라고 봐도 되나?'를 질문하게 된 것이다.



소설 속 '슬아'는 '순문학'에 질문을 던지고, '대중 문학'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마 <가녀장의 시대>가 바로 이슬아 작가가 쓰고 싶던 '대중 문학'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가볍고, 읽기 쉽고, 어렵지 않으면서도 갖가지 질문을 던지며 대중들에게 편하게 다가가는 소설.

그래도 여전히 "이걸 장편 소실이라고 불러도 돼?"라는 의문을 내려놓을 수 없는 건, 나의 아집이겠지.



2. 가녀장이 주는 카타르시스.

가부장사회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몸으로 체화한 문화기 때문에, 가부장제가 없는 사회를 상상하기가 퍽 쉽지는 않다. 가정 내의 위계는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친다. 설령 가부장 노릇을 못 하는 가부장에게도 가부장의 권력이 있다.

가정에 돈을 벌어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딸'인 가정의 역사는 유구하다. 집안의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취업 전선에 뛰어든 누이들은 얼마나 많으며, 딸의 경제력을 착취해 목숨을 연명하는 양육자들의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은지. "내가 너를 이만큼 키웠으니 너는 이제 나를 부양해야한다"는 말은 아들에게보다 딸에게 더 많이 내리 꽂혔다. 그리고 딸들은 으레 그래야하는 줄 알고 그렇게 살아왔다. (안 그런 딸도 물론 있지만!)

돈은 벌어오면서 권력은 갖지 못한 가정의 딸들에게 '가녀장'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최소한으로, 돈을 벌어오는 만큼 존중을 받는 것, 그저 인간 대접을 받길 바랐던 딸들에게는, 돈을 벌어오면서 '가장'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해 가족 구성원에게 존중도 받고 '가장 대접'도 받는 가녀장의 이야기가 대리만족을 줄지도 모른다.



3. 가녀장의 한계, 결국은 가부장을 답습하는 것.

그런데 나는 카타르시스보다는 한계를 더 많이 느꼈다. 결국 가부장을 답습하고 마는 가녀장에게는 가부장사회의 대안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 할 뿐이었다.

할아버지처럼 군림하며 가사노동을 소외시키는 가부장이 아닌, 가사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며 그들의 노동에 감사할 줄 아는 '가녀장'. 슬아는 "이렇게 대단한 나"에 한껏 취해있다. 그래서 복희가 매일 세 끼 밥짓는 노동을 하는데도 '대가를 지불하니까' 쉽게 당연히 여기게 된다. 글로는 그렇지 않은 척하려 애쓰지만. 그리고 가부장을 답습한 자신의 실패를 깨닫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슬아는 그 뒤로도 크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P. 86. 슬아는 삶의 여러 노동을 집안 어른들에게 의탁하며 살아간다. 노동의 대가를 돈으로 지급하지만 어떤 것들은 돈 주고도 사기 힘든 노동이다. (...) 슬아는 개미처럼 글을 쓰면서도 된장은 담글 줄 모른다. 복희는 글을 쓸 줄은 알지만 그걸 하느니 차라리 된장을 담그겠다고 말할 것이다. 복희의 엄마 존자는 된장 담그기에 도가 텄지만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 각자 다른 것에 취약한 이들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로 살아간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지적할 점은, 과연 슬아가 가정에 충분한 수입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 복희의 부엌 노동과 웅이의 청소노동이 끝날 것인가? 하는 지점이다. 혈연 관계가 아니라,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라 정말 돈으로만 묶인 계약 관계라면, 사장이 돈을 지불할 수 없을 때, 직원들은 떠나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사장-직원의 관계도 이미 위계가 있긴 하지만 이들 사이는 계약이 지켜준다. 슬아는 '평등한 가족'인 것처럼 굴지도 않는다.

가정을 회사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위계가 생긴다. 그 위계는 가족 관계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가녀장 슬아는 분명히 직원이자 '모부'인 복희와 웅이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 관계는 집의 방 배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장 아래층(심지어 지하!)에 '안방'이라고 부르지만 복희와 웅이의 방이 있고, 가장 위층에 슬아의 방이자 작업실이 있다. 이 가정의 위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가녀장도 '가장'이다. 즉, 가족의 장(長) 대표,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가족에게는 여전히 위계가 존재한다. 책을 읽으며 가녀장 슬아의 모습에서 우리 아빠가 자꾸 떠올랐다. 가녀장도 가부장도, 지긋지긋해졌다.



독서모임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시점도 들여다봤다. 어떤 분은 가녀장 슬아가 청소 담당 직원이자 아빠인 웅이가 타투를 하고 싶어하자 청소기와 대걸레 이미지를 추천하고, 웅이는 그걸 팔뚝에 그렸다는 부분에서 경악을 했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는 유머로 작용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가정 내의 위계를 읽고 그 위계의 작용 방식을 몸에 지워지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을 썩 유쾌하게 볼 수는 없었다.



4. 소설의 효용.

작가의 말에서 현실의 복희와 웅이를 왜곡하고 바꾸어서 소설에 등장시켰다는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아,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허구였고 '소설'이구나. 물론 어느 정도는 현실의 한 부분을 모사한 것도 있을지 모르지만.

편하고 쉽게 읽히는 글이었지만, 이 소설이 소설이라서 갖는 효용도 확실히 있었다. 상상해보지 못한 세상을 함께 상상해 봤고, 그것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지, 또한 그것이 왜 답이 될 수 있는지, 혹은 왜 답이 될 수 없는지를 고민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또 나의 관점을 다시 돌아보고 또 세계를 확장한다. 작가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관점을 통해 또 하나의 가능성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가녀장의 시대>가 던지는 화두였다.


P. 259. 작가들이 평생에 걸쳐 얻고자 하는 건 전지적인 시점일 것이다. 불가능한 목표지만 연습을 포기할 수 없다. 그건 어쩌면 신의 시선을 상상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가 무엇을 느끼는지 헤아리는 일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나는 고작 미물일 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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