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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Mar 22. 2018

내 삶에 찾아온 비거니즘

나도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바로 직전의 룸메이트는 비건이었다. 그와 함께 사는 것이 결정된 순간부터 나는 최소한 집에서만큼은 비건식을 꾸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비건이 아닌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일 년 정도 함께 살며 서로 감정이 상하는 일이 발생을 하기도 했고, 결론적으로 처음 그와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던 때의 감정보다 그를 아끼게 되는 마음이 옅어지면서, 처음 결심했던 '집에서만큼은 비건식!'의 의지를 무너뜨리게 되기도 했다. 지금 그 룸메이트는 따로 꾸려서 나갔고, 나도 지금 사는 집에서 곧 이사를 나가게 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집에서 비건식을 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하고 있다. 비건 식단을 짜내는 상상력의 빈곤으로 집에 달걀을 들이긴 했지만.


비건은 '완전 채식'을 뜻한다.

채식주의에는 몇 가지 단계가 존재하는데, 아래 표와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물고기와 유제품, 달걀 정도는 섭취하지만 육류 및 가금류를 섭취하지 않는 페스코, 그리고 유제품과 달걀 섭취 여부에 따라 나뉘는 락토와 오보,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을 섭취하지 않는 비건이 있다. 여기다가 낙과만 섭취하는 프루테리언, 주로 채식을 하지만 간헐적으로 융통성 있게 육류를 섭취하는 플렉시테리언 등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전 룸메이트는 비건이었고, 나는 그를 만나면서 비거니즘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채식주의자들이 겪는 차별적인 이야기들은 널리고 널렸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진부하게 늘어놓고 싶지 않다. 더군다나 나는 나를 '채식주의자'라고 명명하기 두려워 그런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플렉시테리언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까. 플렉시테리언이라고 하기에도 평균 육류 섭취가 많은 것 같아 감히 말하지도 못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채식을 선택한다. 공장식 축산업에 고통받는 동물들에 대한 연민이라거나 채식을 시작하고자 한 본인 자신의 건강상의 이유 등등. 그 어떤 이유에서든 대한민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살기로 결심한 이들은 정말 많은 것들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채식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채식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들은 한국만큼 채식하기 좋은 나라가 없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한다. 한국 사람들의 주식이라고 하는 김치에도 젓갈이 들어가기 때문에 채식일 수 없고, 하물며 국물류 요리는 육수가 베이스이고 하다못해 멸치가 들어간 것도 '육수'이다.

그러한 이유로 한국에서는 외식으로 채식인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에는 채식 식당이 생기는 추세이긴 하지만 결국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간간이 있을 뿐이고 지방으로 가면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다.


내가 채식을 고민하게 된 것은 단연코 전 룸메이트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직접적인 정보를 그에게서 취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실천적인 태도를 보며 나의 식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정말로 '일반적인' 수준의 식생활을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수준으로 육류를 섭취하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간헐적이나마 채식을 하고자 마음을 먹었던 것은 육식의 폭력성을 지식으로 습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육식을 선택할 때 연쇄적으로 잇따르는 갖가지 착취 상황들을 때때로 외면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살장에 끌려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소의 모습을 본 적은 없다. 모란 시장을 가 본 적이 없어서 그 앞에 즐비한 철제 사육장의 풀 죽은 개의 모습들을 본 적도 없고, 좁디좁은 닭장 속에서 옴싹달싹 못하는 닭들이 구구구 울어대는 모습을 실제로 마주한 적도 없다. 흔히 ‘채식주의자가 된 계기’가 된 영상들조차 접한 적이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굳이 찾아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습들을 직, 간접적으로 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의외로 쉽게 상상을 할 수가 있었고, 그 장면들은 나에게 폭력으로 다가왔다. 영상이라도 본다면 나는 트라우마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은 내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바, 그런 트라우마를 가지고서 한국에서 채식인으로 살아가게 될 고통은 또 얼마나 클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육류를 소비함으로써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폭력과 착취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할수록 죄책감에 힘겨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즐겨먹는 베지테리안 반미 샌드위치(베트남 샌드위치).

나는 나의 죄책감을 덜 목적으로 간헐적 채식을 선택했다. 비건이었던 전 룸메이트를 배려하는 차원에서도 집에서만큼은 비건식을 실천하고자 했고, 채식을 선택할 수 있는 식당이라면 채식 선택 비율을 높였다. 우유를 마시지 않는 것이 사실 제일 쉬웠다. 어차피 우유가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은 아니었기 때문에, 단지 카페에서 우유 대신 두유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할 때 조금 귀찮음을 감수하면 될 문제였다.


나의 행동과 실천이 크게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다. 나 하나가 고기를 덜 먹는다고 해서 소 떼를 가두어 키우던 공장식 축사가 하나 사라지지도 않는다. 내가 매일 하루 한 끼를 비건식으로 먹더라도, 제 몸에 꽉 끼는 닭장에 갖혀 도살당할 날만 기다리는 닭들이 모두 해방되지도 않을 것이다. 열 개 먹을 참치캔을 다섯 개 먹어도, 인류가 원해에서 참치를 대량 사냥 하는 일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축산 산업, 육류 소비 시스템이 타인의 착취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결코 이 노력을 그만 둘 수가 없게 되었다. 최소한 하루에 한 끼라도 채식 식단을 꾸리게 되고,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채식 식당을 찾아 식사를 하고자 한다. 두 번 먹을 고기를 한 번으로 줄이는 노력 정도를 한다.


어떤 멋진 말로 비거니즘을 실천하자고 사람들을 선동할 자신은 결코 없다. 나는 나의 실천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사실 벅차다. 나를 비건이라고 소개할 수도 없을 만큼 부끄럽고 자신이 없다. 다만 혹시라도 내가 식당에서 "채식 메뉴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할 때, 나와 함께 식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채식에 관심을 보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충분한 기쁨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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