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록 비평가를 꿈꾸는 꼬마 윌리엄의 짧고 강렬한 여정을 그린다. 윌리엄은 록 밴드 스틸 워터의 공연 여정을 함께 하면서 <롤링 스톤즈>에 기고할 특집 기사를 쓴다. 스틸 워터는 나름 지역에서 알아봐 주는 인기 록 밴드지만 월드 클래스 정도는 아니다. 비틀즈나 더 도어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그 높이가 살짝 아쉬운, ‘거의 유명한’ 밴드다. 그래서 영화 제목은 <올모스트 페이머스>다.
영화 초반에 계속 곱씹어 보게 되는 한 대목이 있다. 이제 막 열다섯 살이 된 윌리엄에게는 비평가 선배이자 멘토가 있다. <크림> 편집장인 레스터 뱅스는 어린 나이에 글을 쓰는 윌리엄이 기특한 나머지 이런저런 질문과 조언을 한다.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 레스터와 윌리엄의 첫 대화 장면
레스터: 루 리드 좋아해?
윌리엄: 초기 곡들은요 (…)
레스터: 마약은?
윌리엄: 안 해요
레스터: 똑똑하네, 난 한때 좀 했어. 가끔은 감기약 시럽을 마셨지. 밤새도록 글을 쓰고 또 쓰고, 스물다섯 쪽씩 (드리블하듯이) 줄줄 써 댔어. 페이시스나 콜트레인에 대해서. 그냥 미친 듯이 써 댄 거야.
스물다섯 쪽? 페이시스나 콜트레인에 대해서? 스물다섯 쪽 분량을 토하듯이 쏟아낼 수 있는 작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일기도, 깜지도 그렇게는 못 한다. 처음 내 반응은 당황과 경외 사이를 넘나들었다. 뭐 영화니까 분명 판타지 요소가 있을 것이라. 일말의 희망을 지키기 위한 내 마지막 발악은 영화 속 레스터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무너졌다. 레스터 뱅스는 락 비평, 아니 대중음악 비평계에서 손꼽히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레스터 뱅스의 생전 모습, 상당한 너드미를 느낄 수 있다.
아쉽게도 레스터가 실제로 스물다섯 쪽 비평 글을 ‘드리블하듯이’ 줄줄 썼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롤링 스톤즈>와 <크림>에 주로 글을 썼고, 루 리드나 데이비드 보위 같은 이들이 락스타가 되기 이전에 먼저 그들의 스타성을 알렸고, 특정 밴드에게 너무 가혹한 혹평 폭격을 내린 나머지 <롤링 스톤즈>에서 잘렸고, 감기약을 과다 복용해서 서른세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이 그를 위대한 비평가로 만들었을까. ‘꿀팁’에 메달리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했다.
우연히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글 쪼가리를 보게 되었다 - <어떻게 하면 록 비평가가 될 수 있는가 & 그 방법을 알려주마>. 이 아저씨 제목 하나는 정말 끌리게 잘 짓는다. 1974년에 잡지에 기고된 록 비평가 장광설은 락 비평가의 장단점과 자질, (내가 고대하던) 비법이 있다. (다음은 해당 글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꼽아 번역한 것임)
“첫째로 명심해야 할 건 (…) 네 취향을 다른 사람에게 열성적으로 짜내면서 괴롭히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편을 나눠 밤새워 토론할 수 있게 완전히 얼토당토않은 주제를 가져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록 비평가 칭호를 듣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땡처리 매장 같은 데에 가서 오래된 앨범에 돈을 쏟아붓는 것이다. (…) 목적은 간단하다. 락 비평가는 모든 음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선 록 밴드를 찾아야 한다. 두세 개 정도의 정규 앨범을 내었고, 비록 출중하지 못하더라도 잘 안 알려지면 안 알려질수록 좋다. 너를 포함한 몇 명만이 알고 듣는 밴드여야 한다. (…) 그 밴드 멤버들에게 말하는 거다. 너네 앨범이야말로 명반 그 자체라고!”
“지속성이 바로 핵심이다. 완전 귀찮게 굴면서 네 주장을 관철한다면 사람들은 네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앞선 글과 영화는 꽤나 비슷한 면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레스터의 수제자를 자청하며, 록 비평가 로드맵을 착실하게 따라간다.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무작정 백스테이지에 들어가고, 자신의 운명을 함께 할 스틸 워터를 만난다. 윌리엄은 이들이 얼마나 위대한 록 밴드인지 일장 연설을 한다. 그리고 투어 버스에 자기 몸을 던진다. (뒤 내용이 궁금하다면 영화를 직접 보시길)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 "난 늘 집에 있어, 멋지지 않으니까"
영화는 윌리엄과 스틸 워터의 성장을 주로 다루지만 유독 조력자 레스터에 더 많은 관심이 간다. 내게도 레스터가 필요하기에 그런 걸까. 냉소적이지만 진심 어린 조언을 받고 싶어 하는 걸까. 아무튼 글에서든 영화에서든 레스터의 말에는 위트와 자조가 섞여 있고, 그 안에는 꿋꿋한 그만의 신조가 있다. 록 밴드 너드가 이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나도 모르게 레스터의 비평 모음집을 구입했다.
레스터 칼럼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이 부분에 레스터 뱅스 비평의 모든 정수가 있다. 영화 속 레스터가 어떻게 스물다섯 쪽을 쓸 수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너무나 명쾌한 나머지, 이제야 안 걸 진심으로 후회했다. 색다른 비평을 하고픈 이들은 당장 받아 적는 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