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6. 별을 담는 아이
늦은 오후, 마을의 작은 공원. 기울어진 햇살 아래 낡은 벤치 하나. 그 위에 한 소녀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은별. 중학교 2학년.
은별은 어릴 적부터 청각장애가 있었다.
보청기를 끼고 있지만 세상의 소리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고, 느린 말투와 부정확한 발음 탓에 또래와의 대화는 항상 어색하게 끝났다.
부모님의 사정으로 전학을 오게 된 은별은 할머니 댁에 머물며 마을의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처음 이 학교에 발을 들였을 때, 은별은 마음 한편에 작은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새로운 교실, 낯선 얼굴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 사이에서 그녀는 조용히 자신을 감췄다.
말보다 눈빛으로, 웃음 대신 침묵으로 세상과 거리를 두던 아이.
하지만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는 누군가 다가와 주기를, 말을 걸어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도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고, 쉬는 시간엔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관심을 보이던 친구들도 점점 멀어졌고, ‘은별이는 말이 잘 안 통해.’라는 말이 퍼지면서
점심시간에도 늘 혼자였다.
그런 은별의 유일한 취미는 태블릿으로 그리는 그림이었다.
태블릿은 단순한 기기가 아니었다.
혼자가 익숙해진 은별에게 그림은 외로움을 달래는 창이었고, 색과 선으로 하루를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그 안에는 그녀의 하루가 담겨 있었고,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한 마음속 대화가 그림으로 스며들었다.
그림을 그릴 때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듣지 않아도, 누군가 자신을 이해해 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은별은 그렇게 매일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들을 인스타그램에 하나씩 올리며 조용히 세상과 마음을
나누었다.
그림으로라도,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었다.
말이 어려운 대신, 색과 선으로 전하는 이야기들은 오히려 더 솔직하고 진심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사람들의 시선이 다르지 않았다.
그림과 글 속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장애가 있는 아이'로 보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런 시선에 주눅 들지 않았다.
조용히 전해지는 감정의 언어로, 은별은 세상과 닿고 있었던 것이었다.
방과 후면 늘 그렇듯, 은별은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햇살 비치는 풍경, 나무,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서 그녀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장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갈색 고양이를 보게 되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묘하게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그 모습에 은별은 자연스레 태블릿을 들었다.
그 고양이를 그리던 그 순간이, 초코와의 첫 만남이었다.
며칠 뒤, 벤치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은별의 귓가에 동네 어르신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코야, 또 여기 있었구나? 오늘도 그 친구 옆에 있네."
그 순간 은별의 눈이 커졌다.
'초코… 이름이 초코였구나.'
누군가가 그 고양이를 그렇게 불렀을 때,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은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초코…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정말 너 같아."
그날 이후 은별은 공원에서 그림을 그릴 때면 늘 초코를 찾아보았다.
초코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담장 위에 앉아 있었고, 은별이 태블릿을 꺼내면 자연스레 모델처럼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림이 마무리되면, 초코는 천천히 담장에서 내려와 은별 옆 벤치로 다가왔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골골골 소리를 내며 은별의 팔에 머리를 비비고 몸을 문질렀다.
은별은 웃으며 말했다.
"넌 정말 내 전속 모델이야. 나만의 첫 번째 모델. 앞으로도 꼭 그래줘야 해."
초코는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다, 한 번 느긋하게 "야옹—" 하고 울었다.
은별은 그 소리에 다시 웃으며 태블릿을 꼭 안았다.
그 순간, 초코와의 조용한 우정이 더 깊어진 듯했다.
어느 날 오후, 평소처럼 벤치에 앉아 초코를 그리고 있던 은별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어? 너 은별이지?"
은별은 고개를 들었다. 같은 반, 같은 동네에 사는 유나였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은별은 조심스레 태블릿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아니.. 그냥... 그림을... 좀... 그리고... 있어 "
"그래? 나도 한번 구경해도 돼?"
은별은 잠시 망설였다. 갑작스럽게 낯선 누군가가 다가오면 언제나처럼 마음이 굳어버렸다.
유나는 그런 은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진짜 궁금해서 그래. 네가 직접 그린 거면… 나 너무 보고 싶어."
그 말에 은별은 유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놀랍도록 따뜻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은별은 말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태블릿을 유나에게 건넸다.
"와— 이거… 네가 그린 거야?"
은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헐… 진짜 잘 그린다! 이 고양이, 복지관 앞에 있던 애 아니야?"
은별은 공원 한쪽 운동기구 위에 앉아있는 초코를 가리켰다.
유나는 초코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귀여운 냥이야, 안녕!"
은별은 어눌한 발음으로 조심스레 말했다.
"이름이… 초코야."
유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초코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초코야, 안녕! 진짜 예쁜 이름이네."
그 모습을 본 은별은 마음속에서 조용한 파문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단 한 명의 친구, 초코에게 이렇게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유나는 은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다른 그림들도 보여줄 수 있어? 진짜 보고 싶어."
은별은 순간 움찔했다. 낯선 누군가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일은 늘 두려웠다. 혹시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혹시 비웃지는 않을까.
하지만 유나는 태블릿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두 손을 모았다.
"정말, 보고 싶어서 그래. 너 그림 너무 예뻐."
그 눈빛에, 은별은 조용히 숨을 내쉬며 태블릿을 살며시 넘겼다.
그녀의 손끝이 떨렸지만, 마음은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고양이들과 풍경, 노을 진 하늘, 그리고 초코가 담긴 수많은 장면들.
유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은별아, 너 그림 진짜 예쁘다… 있잖아, 나 이거 다른 친구들한테도 소개해줘도 돼? 인스타 계정 알려줘!"
은별은 잠깐 망설였지만, 유나의 반짝이는 눈빛에 조심스럽게 태블릿 화면을 눌러 자신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보여주었다.
"이거… 이거야."
유나는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발견한 듯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유나는 은별에게 신이 난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은별은 밝게 웃으며 악수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초코는 여전히 운동기구 위에 앉아 있었다. 유나는 초코를 바라보며 웃었다.
"너 도야, 초코. 너도 나랑 계속 친하게 지내야 돼. 알았지?"
초코는 작게 "야옹—" 하고 울며,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날 이후, 은별의 인스타그램은 조용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은별이 그린 고양이 너무 귀엽다!'
'이거 진짜 중학생이 그린 거 맞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이야.'
그녀의 팔로워는 점점 늘었고, 학교에서도 그녀를 알아보는 친구들이 생겼다.
"은별아, 오늘은 안 그렸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은별아, 나도 그림 그리는 거 좀 알려줘! 나도 그리고 싶어."
"은별아, 나도 초코 구경 가도 돼? 직접 보고 싶어~"
은별은 놀란 눈으로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말은 서툴렀지만, 눈빛은 따뜻했고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밝았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들에게 쑥스럽게 웃음을 보여주었다.
은별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목소리가 있고, 그녀의 그림을 함께 보고 싶어 하는 손길이 있었다.
은별은 오늘도 공원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초코는 옆에서 느긋하게 햇살을 쬐고 있고, 은별은 화면에 집중하며 중얼거린다.
"오늘은… 너 웃는 얼굴로 그려줄게."
그리고 태블릿 한구석에 이렇게 적는다.
"소리는 안 들리지만, 네가 있어. 내 마음은 들리지 않아도 전해질 수 있어."
어느 날, 은별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집 안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엄마와 아빠가 환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은별아! 우리 이제 같이 살 수 있어."
"그래! 아빠가 이번에 다른 지역으로 좋은 직장을 얻게 됐어. 이제는 네가 우리랑 같이 지낼 수 있단다."
기뻐해야 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은별의 표정은 굳어갔다.
초코와 함께한 공원,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된 친구들, 무엇보다 이제 막 시작된 행복한 학교생활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빠가 다가와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빠랑 같이 가는 게 싫어?"
은별은 입술을 꾹 다물다가 힘없이 말했다.
"… 아니에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작은 발걸음이 공원으로 향했다. 벤치에 앉은 은별은 아무 말 없이 눈물을 쏟았다.
너무나 조용한 울음이었다.
이때 초코가 또다시 은별의 곁으로 다가왔다. 초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마치 말하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게 잘될 거야. 걱정하지 마.'
초코는 조용히 벤치 위로 올라와 은별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은별의 무릎에 이마를 살짝 기대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은별은 중얼거렸다.
"고마워… 초코야. 오늘도 네가 내 곁에 있어주는구나."
이 소식은 곧 학교에도 전해졌다.
"은별이 또 이사 간대?"
"싫어, 같이 그림 그리고 싶었는데…"
유나는 친구들과 함께 은별 곁에 찾아가 말했다.
"은별아, 우리 계속 같이 있고 싶어. 너 없으면 안 돼."
많은 친구들이 은별의 곁을 지키며 함께 슬퍼했다.
결국 은별은 상담선생님께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선생님…"
은별은 몇 번을 망설이다 조용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지금까지 이렇게 친구 생긴 거 처음이에요. 학교도… 이렇게 다니고 싶었던 건 처음이에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말이 잘 안 통해서… 늘 혼자였는데, 이제는… 그림 그리면 같이 웃어주는 애들도 생기고… 초코랑 공원에서 같이 있는 게 제일 행복해요."
은별은 태블릿을 꼭 안은 채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근데… 또 떠나야 된다고 해서… 너무 슬퍼요. 진짜 싫어요. 여기 있고 싶어요."
그제야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은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기 남고 싶어요. 제발…"
선생님은 조용히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구나. 너에게 이곳이 얼마나 소중한지… 부모님도 아시면 분명 이해하실 거야."
며칠 후, 상담선생님은 은별의 부모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듣던 부모님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은별이가 학교에서 그렇게 잘 지내고 있었어요? 우리가 몰랐네요…"
그리고 이내 조용히 웃으며 딸을 바라보았다.
"그래. 아빠가 조금 더 고민해 볼게.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곳이라면… 우리 은별 마음이 더 중요하지."
그날 저녁, 아빠는 은별에게 말했다.
"은별아, 아빠 직장이 조금 멀어져서 아빠는 주말에만 올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엄마가 이 동네에서 직장을 알아볼 거야. 엄마랑 할머니랑 같이 여기서 지내면서 지금 학교 계속 다녀도 되니까… 걱정하지 마. 우린 네가 행복한 게 제일 중요하단다."
은별은 아무 말 없이 부모님을 안았다.
그날 밤, 그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초코를 꼭 안고 속삭였다.
"다행이다… 너랑 친구들과 헤어지지 않아서."
은별은 여느 때처럼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은별아, 오늘 그림 수업 있어? 나도 고양이 그리고 싶어!"
친구들은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보며 함께 웃고 이야기했다.
그림 속 초코의 일상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가까이했다.
은별은 조심스러운 말투지만, 환한 미소로 친구들의 질문에 답하며 하나하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눈빛은 이제 외롭지 않았다. 온전히 그들 사이에 있었다.
마을 공원의 벤치, 오후의 따스한 햇살 아래. 초코는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은별이가 오면 조용히 옆에 앉고, 아이들이 몰려오면 살며시 물러났다 다시 다가온다.
어떤 날은 홀로 벤치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또 어떤 날은 고양이 친구들과 함께 마을 골목을 순찰하기도 한다.
초코는
그저 사람들 곁에 머무르며, 조용히 바라본다.
말은 없어도, 초코는 알고 있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