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이야기 3

꼬막향 따라, 녹차향 따라 — 보성 벌교 하루 이야기

by 목마르다언덕

한 그릇의 기억, 한 장의 역사


여수에서 출발한 아침. 계획보다 더 평화로웠던 바람과 함께 우리는 벌교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맛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시대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삶의 깊이를 건드린, 그런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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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건물에 담긴 100년의 이야기 — 벌교 금융조합


벌교 읍내 중심,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띈다. 바로 벌교 금융조합이다.

1923년 일제강점기, 지주 중심의 경제 구조와 일본 자본의 침투 속에서도,

지역 소작농과 상인들은 자립적인 금융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금융조합이다.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라, 당대 민중의 자주적 의지와 협동정신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우리가 방문했을 땐 따뜻한 미소의 해설사 선생님이 계셨다.

금융조합의 설립 배경부터 벌교가 안고 있는 근현대사의 굴곡까지 차분히 설명해 주셨고,

덕분에 이 건물이 단순한 벽돌덩어리가 아님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당시 조합원들이 입었을 법한 근대 복장을 입어보기도 했다.

중절모를 쓰고 옛 교복을 입고 찍은 한 장의 사진.

마치 100년 전 조선으로 타임슬립한 듯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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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이 모두 사라져서 더 그리운 빵집 — 모리씨 빵가게


금융조합을 나와 걷던 골목, 노란 지붕의 작은 베이커리 ‘모리씨 빵가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진열대는 정갈하고 따뜻했지만,
문 앞에는 ‘오늘 준비한 빵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 빵집은 매일 정해진 양만 구워 당일 판매하고,
모두 팔리면 문을 닫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현지인에게도 여행자에게도 인기 높은 곳.

여유를 부리다 소진된 빵

우리는 모리씨의 빵을 맛보진 못했지만,

놓친 빵 한 조각이 오히려 더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20250615_125811.jpg 이때 빵을 샀어야 하는데...


국일식당, 벌교 밥상의 정수


벌교초등학교 근처 골목 안쪽.
겉보기엔 소박하지만, 국일식당 안의 밥상은 한 상 가득 정성으로 가득했다.

짱뚱어탕과 꼬막정식.
꼬막무침, 꼬막전, 생선구이…
모든 반찬이 벌교의 자연과 손맛을 담고 있었다.

짭짤하고 고소한 꼬막 풍미에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니
몸도 마음도 금세 풀렸다.
이곳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기억이 차려지는 식탁이었다.

그리고

주인장 사장님의 친절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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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문학관, 그 시절이 말을 걸다


식사를 마친 후 들른 곳은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테마로 한 태백산맥 문학관이었다.

2008년 개관한 이 문학관은 벌교가 단지 소설의 배경이 아닌, 시대를 품은 공간임을 보여주는

곳이다.

문학관 내부에는 작가의 육필 원고, 당시 집필 배경, 그리고 인물별·사건별 전시가

체계적으로 구성돼 있었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을 통해 분단과 전쟁, 이념에 짓눌린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했고, 이 문학관은 그 울림을 시각적으로 되살려낸다.

문학관 뒤편, 골목 끝에는 ‘소화의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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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지붕 아래 낮은 대문, 낡은 마루, 장독대, 그리고 삐걱이는 문짝. 소설 속 소화가

살았던 집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다.

그 집은 소화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시대에 눌려 감정을 말하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의, 그리고 이 땅의 민중들의 이야기였다.

소화는 이념이 아닌 삶을 선택했던 존재이고, 그 집은 그녀의 고단한 사랑과 인내가

고여 있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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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맞은편에는 ‘현부자네 대저택’도 재현돼 있다.

높은 대문과 넓은 마당을 가진 기와집. 그 두 공간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시대가 갈라놓은 두 계급의 상징이었다.



보성 녹차밭, 초록의 고요 속으로


벌교에서 차로 약 30분 남짓, 고즈넉한 시골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바로 보성 대한다원이었다.
1939년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차밭이 개간되며 시작된 이곳은 해방 이후 한국인의

손으로 넘어와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녹차밭으로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국내 녹차 생산의 중심지이자, 사계절 내내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자연 속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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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등성이를 따라 계단처럼 펼쳐진 찻잎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이며,
하나의 초록 물결이 되어 산 전체를 감싼다.
정돈된 선들, 차분한 색감, 그리고 곳곳에 놓인 정자와 작은 길들은
마치 자연이 만든 미술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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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밭 사이를 걸었다.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햇살이 이마에 내려앉았다.
모든 풍경이 조용했지만, 그 침묵은 깊고 따뜻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나를 위로해 주는 풍경.
마치 마음의 속도를 느긋하게 낮춰주는 친구처럼 느껴졌다.

정자에 앉아 멀리 펼쳐진 차밭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초록의 이어짐은
내 안에 쌓인 생각들을 고요히 정리해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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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삼아 먹은 녹차 아이스크림은 이곳의 풍경과도 닮아 있었다.
달콤함 속에 숨은 쌉싸름한 맛, 입 안에서 천천히 퍼지는 은은한 차향,
그리고 손바닥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그 감촉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보성은 '보는 초록'이 아니라, '머무는 초록'이었다.
언젠가 마음이 지칠 때, 이유 없이 다시 찾고 싶은 풍경.
그곳은 내 안의 속도를 되찾게 해주는, 아주 느린 장소였다.




망태 요리사의 정원 — 와인동굴에서 마무리하는 하루


여수로 돌아오는 길, 들른 곳은 다소 특별한 이름을 가진 ‘골망태 요리사의 정원’이었다.

‘와인동굴’로도 알려진 이곳은 입구부터 작은 정원과 동화 같은 풍경이 반겨준다.

카페 입구에는 보리수와 산앵두나무가 열매를 매단 채 서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주인장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마음껏 따서 드세요.” 그 말 한마디에, 이곳이 단순한 카페가 아닌 사람의 온기를

담은 공간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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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가 막걸리 와인으로 유명한 곳 맞나요?” 하고 물었고,

주인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카페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카페에서 막걸리를 시음하고, 동굴을 보러 나왔다.

동굴은 인공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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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이 공간은 주인장과 그의 아버지가 무려 6년에 걸쳐

직접 뚫고 조성한 동굴이었다.

땅을 파고, 돌을 다듬고, 길을 내고,

와인을 숙성시킬 수 있는 공간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벽면에는 수제 와인병과 지역 막걸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그 공간은 마치 지하 성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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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곳에서 수제 막걸리 한 병을 샀다.

그 안에는 단지 술이 아니라, 이 정원을 가꾼 이들의 시간과 정성,

그리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따뜻한 여운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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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하루, 깊은 여행


벌교 금융조합의 붉은 벽돌 속 100년의 시간,
해설사님의 진심 어린 설명,
놓쳐버린 모리씨 빵가게의 향기,
국일식당 밥상 위의 계절,
태백산맥 문학관의 울림,
보성 녹차밭의 바람,
막걸리 한 병에 담긴 귀갓길.

이 모든 것을 안고 돌아오는 길. 나는 생각했다.
오늘 우리는 ‘보러 간’ 것이 아니라, ‘머물렀다’는 기분이었다.
한 동네의 삶 속에, 한 시대의 기억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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