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는 나의 취향을 책임질 수 있는가

나의 ‘좋음’이 당신에게 ‘폭력’이 되지 않기를

by 김삼월

'취향 존중'이라는 말은 참 편리하다. 우리는 이 말을 방패 삼아 나의 기호를 전시하고, 타인의 간섭을 차단한다. 하지만 나는 종종 두렵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힘든 소음이나 악취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향기로우나, 숨 막히지 않게



나는 향수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풀 냄새가 섞인 싱그러운 향을 사랑한다. 나에게 이 향은 아침을 깨우는 활력이고, 나를 표현하는 가장 세련된 언어다. 하지만 내가 이 향수를 온몸에 들이붓고 만원 지하철에 탄다면 어떨까? 꽉 막힌 공간에서 누군가는 나의 '세련됨' 때문에 두통을 호소할지도 모른다.


이때 나의 '좋음(Goodness)'은 명백히 타인에게 '폭력(Violence)'이 된다.


내가 아무리 "이건 아주 비싼 것이며, 나의 고유한 취향입니다"라고 주장해도, 상대방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진정한 세련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좋은 향을 고르는 안목에 있지 않다. 나의 향기가 타인의 호흡을 침범하지 않을 '적절한 농도'를 계산하는 배려,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고유함과 무례함의 경계



옷차림도 마찬가지다. 나는 무채색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컬러로 포인트를 주는 것을 즐긴다. 프라이탁 가방의 낡은 듯한 질감과 원색의 조화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 '다름'이 '틀림'으로 비치지 않으려면, 혹은 타인의 시선에 시각적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철저한 계산이 필요하다.


지나침과 모자람 사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은 윤리 교과서 속에만 있는 말이 아니다. 나의 개성이 드러나되, 그것이 타인을 불편하게 하거나 위압감을 주지 않는 그 미묘한 균형점을 찾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스타일의 윤리다.


나의 고유함을 지키는 것이 타인의 평온을 깨뜨리는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은 쿨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게으르고 무례한 말일 수 있다.



다름을 우아하게 존중한다는 것


결국 '취향의 윤리학'이 도달해야 할 곳은 '우아한 존중'이다.


나의 취향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취향도, 혹은 취향이 없음을 선택한 그들의 태도조차도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촌스러움을 싫어한다고 해서 나에게 촌스러운 사람을 비난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나의 세련됨이 그들에게 위화감이 아닌, 신선한 자극이나 조용한 영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나의 취향을 책임지고 있는가?

이 질문은 이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나는 나의 취향이 타인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섬세하게 조율하고 있는가?"

나의 좋음이 당신의 괴로움이 되지 않기를. 나의 선명한 색채가 당신의 눈을 찌르지 않기를. 그리하여 나의 고유함이 당신의 다름과 부드럽게 섞이기를.

이 철저한 계산과 배려 속에서만, 우리의 취향은 비로소 윤리적인 아름다움을 입는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