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라
"너 취향 참... 특이하다, 왜 그런 걸 좋아해?"
살면서 한 번쯤은 마주하는, 예고 없이 날아드는 질문. 어떤 이에게는 단순한 호기심일지 모르지만, 어떤 이에게는 비수처럼 꽂히는 무례함이기도 하다. 나의 고유한 색깔을 '남다름'이 아닌 '유별남'으로, 혹은 '틀린 것'으로 규정당하는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축되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수 밖에 없다.
나의 취향이 누군가의 이해 범주를 벗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깨지기 쉬운 취향 vs. 단단해지는 취향
나심 탈레브는 저서 ‘안티프래질(Antifragile)’에서 충격과 무질서를 마주했을 때 단순히 버티는 것을 넘어,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성장하는 성질을 '안티프래질'이라 정의했다.
우리의 취향과 관련하여서도 ‘안티프래질‘할 수 있다면? 타인의 시선이라는 충격을 받았을 때, 유리처럼 와장창 깨져버리는 취향은 '프래질(Fragile, 취약한)'하다. "남들이 별로라니까 바꾸자"라며 무채색의 안전함 뒤로 숨어 버린다면 나의 고유함은 사라진다. 반대로 고무공처럼 튕겨내기만 하는 것도(Anti, 반대) 그저 버티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진정한 '취향의 생존'은 안티프래질(Antifragile), 즉 두 가지 성질을 양가적으로 취할 때 가능해진다. "너 왜 그래?"라는 질문을 받을 때, 그것을 내 취향의 뿌리를 다시금 확인하고 더 깊게 내리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아, 나는 이래서 이걸 좋아하는구나.'
'저 사람의 눈에는 낯설겠구나.'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불호(不好)는 나의 호(好)를 더 선명하게 조각해 준다. 상처를 받을수록 굳은살이 배기고, 그 굳은살은 나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근육이 된다. 결국 역설과 아이러니는 세상을 조화시키고 아름답게 만든다.
물처럼 흐르는 취향, 상선약수(上善若水)
하지만 단단함만이 능사는 아니다. 너무 강하면 또 부러지기 마련이니까. 여기서 우리는 노자의 지혜를 빌려올 필요가 있다. 도덕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며,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게 변한다. 네모난 그릇에 담겼던, 둥근 그릇에 담겼던 간에 어쨌든 ‘물은 물’이다. 모양이 변한다고 해서 스스로 본질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타협은 하면서 타협하지 않는 ‘역설’이 여기서도 또 등장한다.
우리의 취향은 결국 물처럼 흘러야 한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바위를 만났다면? 굳이 부딪쳐 깨지려 하지 말자. 그저 유유히 휘감아 흐르면 그만이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지혜. 내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설득하거나, 그들을 촌스럽다고 비난하며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길을 흐르는 것이다.
고이지 않고, 만물을 이롭게 하라
흐르지 않는 물은 결국 썩게 된다. 나만의 세계에 갇혀 타인을 배척하는 취향은 고인 물과 같다. 그것은 '고집'이지 '취향'이 아니다.
진정으로 건강한 취향은 흐르는 물처럼 세상에 스며든다. 안티프래질하게 단단해진 내면을 품고, 겉으로는 물처럼 유연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것. 내가 향유하는 아름다움이, 내가 입고 쓰는 물건들이, 내가 추구하는 삶의 태도가 결국 타인에게도 신선한 영감이 되고 긍정적인 자극이 되는 삶.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취향의 윤리학'이다.
누군가 당신의 취향을 두고 "특이하다"라고 말한다면, 이제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의 취향은 흐르고 있구나! 썩지 않고, 세상에 새로운 물길을 내고 있구나!‘
상처받을수록 더 선명해지고, 물처럼 흘러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취향의 생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