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은 쟁취하는 것이다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나는 가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사주를 흥미롭게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사주를 믿어도 되는가?“
나는 사주를 믿지 않는다. 사주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어 인간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수동적인 운명론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꽤나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사주명리학은 우주의 재료인 오행(목화토금수)과 음양(-, +)의 조화를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니 사주명리학은 이 넓은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도구일까? 사주명리학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운명 예언서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인간의 ‘기본 설정값(Default, 디폴트)’이 적힌 기술서에 가까울 것이다. 내게 어떤 기운이 과도하게 몰려 있는지, 반대로 어떤 기운이 턱없이 부족한지, 그리고 어떤 시기에 어떤 형태의 파도가 밀려올 가능성이 높은지를 보여주는 데이터베이스 말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함정에 빠진다. 첫 번째는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 이 설정값에 스스로를 가두고 모든 것을 팔자 탓으로 돌리는 ‘책임 회피’.
그리고 두 번째 함정은 바로, 이 정해진 운명을 어떻게든 피해보겠다며 매달리는 일차원적이고 맹목적인 ‘개운(開運)’ 행위다.
운을 틔운다는 명목하에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한다. 지갑 속에 조잡하게 쓰인 붉은 부적을 찔러 넣거나 사주에 불(火)이 부족하다며 새빨간 속옷을 입거나, 심지어 평생 불려 온 자신의 이름을 하루아침에 낯선 이름으로 개명해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맹목적인 방법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함을 준다.
운명을 대하는 촌스러움에 대하여
내가 말하는 ‘촌스러움’이란 단순히 시각적인 미감의 부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맹목적인 개운 행위같이 논리와 주체성이 결여된 채, 미지의 두려움에 쫓겨 무언가에 매달리는 태도 ‘그 자체’도 포함된다.
과연 나의 결핍을 이해하고 스스로 보완하려는 노력 없이 운을 좋게 만들 수 있을까? 돈을 주고 부적 한 장을 썼다고 해서, 내 인생의 궤도가 바뀔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분명 ‘아니오’일 것이다. 내 삶의 주도권을 알 수 없는 미신적 힘에 고스란히 헌납하는 행위는 ‘윤리적 취향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은 ‘원자재’이다. 즉 그것은 내가 능동적으로 재단하고 편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취향을 통해 이 원자재를 가장 세련되고 주체적으로 다룰 수 있다.
계산된 미학, 취향으로 운명을 통제하다
사주에 부족한 기운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부적이 아니라 나만의 확고하고 정교한 취향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즉, 취향이라는 거름망을 통해 일상의 감각을 내가 원하는 최적의 상태로 세팅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는 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옷을 입는다. 나는 이것이 진짜 개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 좋은 기분을 유지하면, 스트레스는 줄어들고 나쁜 기운들은 빠져나간다. 그리고 빠져나간 공간에 긍정적인 것들이 채워진다. 결국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은, 미신적인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내면을 항상 단단하고 평온한 상태로 유지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취향’을 통해 가능하다.
사진을 찍듯, 일상을 디렉팅(Directing)하라
이러한 접근은 마치 좋은 사진을 찍는 과정과 같다. 훌륭한 사진은 우연히 셔터를 눌러 얻어걸리는 것이 아니다. 피사체의 특징을 파악하고, 명확한 컨셉을 잡은 뒤, 그것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표정과 구도, 빛의 각도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낼 때 비로소 완성도 높은 한 컷이 탄생한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주라는 지도를 통해 나의 지형지물을 파악했다면, 이제는 내가 디렉터가 되어 일상이라는 앵글을 계산해야 한다. 내가 곁에 두는 물건, 내가 소비하는 브랜드, 내가 매일 아침 고르는 향수와 펜 한 자루까지. 이 모든 선택은 우연이 아니라 내 운명의 결핍을 채우고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미학적 장치들이어야 한다.
오랜 시간 변치 않는 클래식한 브랜드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곁에 두는 것 역시, 유행이나 운명의 파도에 쉽게 휩쓸리지 않겠다는 단단한 코어(Core)를 구축하는 일이다. 내 삶을 구성하는 작은 조각들을 나의 깐깐한 기준과 취향으로 온전히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서사 안에서도 압도당하지 않고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도구의 주인이 된 자의 여유
결국 진정한 의미의 개운(開運)이란, 외부의 신비로운 힘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한 해상도를 극한으로 높인 뒤, 치밀하게 다듬어진 나만의 취향으로 일상을 직조해 나가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화(火)가 많은 나’를 탓하는 대신 그 에너지를 세련된 열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기획하는 것. ‘기운이 약한 시기’라는 결과표 앞에서는 위축되는 대신, 곁에 두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좋은 물건들과 함께 일상을 더 단단히 정비하는 것.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취향은 쟁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쟁취한 확고한 취향은 어떤 부적보다도 강력하게 나를 지켜준다. 미신적인 두려움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철저히 계산된 아름다움과 주체적인 선택을 채워 넣자. 그것이 이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자신만의 지도를 손에 쥔 채 걸어가는 사람의 가장 우아하고 윤리적인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