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 반려물건 입양하기
우리는 엄지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모든 취향을 재단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좋아요’는 취향을 재단하는 수단이 된다. SNS 피드에는 매초 수십 장의 '신상'과 '핫플레이스'가 쏟아지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좋아요'를 누른다. 그러면서 동시에 타인의 삶을 욕망한다.
타인은 나보다 비싼 집에 살며, 비싼 차를 몰고, 비싼 음식을 먹으며, 그러면서도 쿨하다. ‘좋아요’는 그런 삶에 대한 동경의 표현이 된다.
하지만 그 동경의 끝에서 우리는 종종 기묘한 공허함을 마주한다. 왜냐하면 동경은 동경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소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공간은 불필요한 물건들로 가득 찬다.
소비는 자기 증명의 수단이 된다
우리는 흔히 소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나 이 정도 브랜드는 써", "나 이렇게 트렌디해"라고 말하기 위해 결제 버튼을 누른다.
결국 우리는 물건이 아니라 ‘이미지’를 구매한다. 고급스러움은 결제와 동시에 내 자아에 의탁한다. 사실 ‘있어 보임‘은 ’실제 있는 것‘ 보다 훨씬 가성비다. 예를 들어 100만 원을 쓰면 실제 자산이 10억이 아니더라도, 10억 자산가처럼 보일 수 있다. 10억을 실제로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적은 비용을 치르고 ’10억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면, 이것은 꽤나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증명을 위한 소비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동반한다. 트렌드는 바뀌고, 신제품은 구형이 되며, 타인의 시선은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증명해야 할 대상이 외부에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소비의 러닝머신 위를 달려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소비의 러닝머신에서 영원히 내려올 수는 없는 것일까?
진정한 취향인은 소비를 증명이 아닌 정체성의 도구로 삼는다.
소비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가장 정직한 언어여야 한다. 이때의 핵심은 ‘일관성’이다. 유행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에 부합하는 물건을 고르고, 그것을 오래도록 곁에 두는 태도. 그것이 바로 소비가 정체성이 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반려물건‘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해야 한다. 반려동물이 단순히 귀여워서 키우다 버리는 존재가 아니듯, 반려물건 또한 쓰다 질리면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반려물건은 나와 함께 늙어가는 사물이다.
첫 월급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입양한 나의 블루투스 스피커,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선물 받은 커피머신과 공기청정기, 이미 두 번이나 찢어졌지만 어찌어찌 꿰매어서 입고 있는 나의 애착 니트 등. 이 물건들에는 '가격표'로는 환산할 수 없는 ‘서사'가 담겨 있다. 새것이 주는 반짝임은 없지만, 대신 나와 함께한 시간의 두께가 존재한다. 물건을 반려의 대상으로 삼을 때, 우리는 비로소 물건을 아끼고 관리하며, 쉽게 버리지 않는 윤리적 태도를 갖게 된다.
윤리적 취향인의 탄생
윤리적 취향인이란 단순히 친환경 제품을 사는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 윤리적 취향인은 자신의 물건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그들은 물건을 들이는 문턱은 높이되, 한번 들인 물건과는 깊은 관계를 맺는다. 소비를 통해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는 대신, 자신의 일관된 취향을 묵묵히 쌓아가는 것. 역설적이게도, 가장 윤리적인 소비는 '소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소비하고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좋아요'의 홍수 속에서 휩쓸려 다니지 않으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내가 사려는 이 물건은, 나의 과시욕을 채워줄 일회용품인가, 아니면 나의 삶과 함께 나이 들어갈 반려물건인가?"
소비가 증명이 아닌 정체성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물건의 주인이자 삶의 주인이 되고, 비로소 ‘윤리적 취향인’의 탄생이 이루어진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구매한 물건들이 방 한구석에 쌓여갈수록, 정작 '나'는 나 자신이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좋아요'가 아니라,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 줄 윤리적 취향일 것이다. 이제 소비는 증명이 아니라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