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취향은 어떻게 전염되고 상속되는가

가르치지 않고 조용히 물들이는 삶의 태도에 관하여

by 김삼월

사람들은 끊임없이 취향을 설명하려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유독 취향에 대한 언어들로 소란스럽다. 어떤 커피가 왜 훌륭한지, 이 브랜드의 철학이 얼마나 깊이 있는지, 저 제품의 디자인이 왜 독보적인지 입을 모아 말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나열하며, 마치 잘 조립된 문장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똑같은 취향을 빚어낼 수 있을 거라 믿는 듯하다. 마치 취향이 수학 공식이나 논리로 설득될 수 있는 것인 양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말로 깊고 단단한 취향을 가진 사람일수록 말을 아낀다. 그들은 자신이 왜 이것을 선택했는지 길게 변호하지 않는다.


“그저 고른다. 입는다. 머문다. 그리고 그 행위를 조용히 반복한다.”


특정한 질감의 셔츠를 즐겨 입고, 어느 계절이 오면 늘 같은 음악을 틀며, 자신만의 리듬으로 걷고 멈춘다. 그들에게 취향이란 남에게 증명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호흡일 뿐이다. 그리고 그 호흡이 오래도록 반복될 때, 그것은 마침내 하나의 고유한 ‘풍경’이 된다.



취향은 교육될 수 있을까?



나는 한동안 취향이라는 것이 교육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발견한 좋은 것, 아름다운 것, 가치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정교하게 설명해 주면 그들도 자연스레 그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여겼다. 예술의 역사적 배경을 짚어주고, 공간의 비례를 설명하고, 소재의 차이를 알려주면 상대방의 안목도 단숨에 틔워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오히려 머리로 이해시키려 설명하면 할수록, 취향은 본연의 힘을 잃고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내가 열변을 토하는 순간, 취향은 생동하는 감각이 아니라 외워야 할 ‘규칙’이 되었고,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틀리면 안 되는 ‘정답’이 되어버렸다.


가르쳐진 취향은 대체로 서로를 기묘하게 닮아 있다. 겉모양은 매끈하고 그럴듯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어딘가 공허하다. 그것이 공허한 이유는 자신의 시간과 경험을 태워 얻어낸 감각이 아니라, 남의 정답표를 베껴 쓴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 것이 아닌 옷을 입은 사람의 태도에는 늘 미세한 어색함이 배어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결국 취향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전염’의 대상이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취향이 내 삶 속으로 훅 하고 스며드는 순간은 늘 우연하게 찾아온다. 오래 입어 소매가 살짝 해진 재킷을 무심하게 걸쳐 입은 태도, 남들은 잘 모르는 후미진 골목의 작은 카페를 별다른 이유 없이 반복해서 찾는 모습, 대화 중에 습관적으로 고르는 다정하고도 단단한 단어들. 그리고 그 모든 사소한 선택들이 촘촘히 모여 만들어내는 그 사람만의 일관된 분위기.


그것들은 결코 논리로 분해되거나 이해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그리고 오래도록 바라보게 될 뿐이다. 향기가 방 안을 서서히 채우듯, 취향은 그렇게 풍경처럼 작동하며 사람의 마음을 물들인다.



취향의 안내자



진정한 안내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조용히 등장한다. 안내자는 무언가를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 아니다. 안내자는 설득하지도 않는다. 또 타인의 선택을 섣불리 평가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선택을 변명하듯 설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묵묵히,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것들을 선택할 뿐이다. 그리고 세상의 유행이 어떻게 요동치든 그 선택을 흔들림 없이 유지한다.


그 사람의 낯선 선택을 처음 마주했을 때, 우리는 종종 당혹감을 느낀다. ‘왜 굳이 저런 불편한 것을 고집할까‘하는 묘한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이상하게도, 어떤 풍경이 곁에서 변함없이 반복되면 서서히 그 풍경에 적응하게 된다. 그렇게 익숙함은 호기심을 부르고, 호기심은 조심스러운 모방을 낳는다. 그 사람이 읽던 책을 슬쩍 펼쳐보고, 그 사람이 즐겨 마시던 차를 한 모금 따라 마셔본다. 처음엔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어색하지만, 모방했던 방식 위에 나의 습관이 섞이고, 그 사람의 색깔에 나의 채도가 더해지면, 온전히 ‘나의 것’이 생겨난다.


‘취향의 상속.‘


취향은 그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진다. 말이 아니라, 곁에 머무는 관계와 공기를 통해서 계속 이어진다.


물론 모든 취향이 누구에게나 전염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안목이 내 삶에 이식되는 이 마법 같은 일은, 언제나 특정한 관계에서만 일어난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아무에게서나 삶의 태도를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깊이 신뢰하는 사람, 내면의 어딘가를 간절히 닮고 싶은 사람, 그러면서도 내가 묘한 동경을 품게 만드는 사람. 그 적당하고도 미묘한 거리감 속에서만 취향이 강력하게 전염된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감에서 좋은 안내자는 언제나 ‘경계선’에 머문다.



침묵의 상속



경계선은 타인의 세계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다정한 예의인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함부로 내어주지 않겠다는 단단한 오만이다. 우리는 바로 그 서늘하고도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비로소 타인의 취향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 ‘동경’하게 된다.


동경은 아주 구체적인 물성을 통해 시작된다. 무심하게 꺼내 든 만년필의 예리한 펜촉이 두툼한 노트 위를 사각거리며 지나갈 때, 낡고 투박한 소재의 가방을 어깨에 걸쳤을 때 등. 이 파편적인 감각들은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어떠한 논리적 설득도 품고 있지 않다. 그저 그 사람의 일상 속에 너무도 당연한 듯, 하나의 필연처럼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철저히 사적이고 고유한 필연을 목격한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취향이란 단순히 어떤 물건을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고 관계 맺는 방식을 증명하는 서명과도 같다는 것을.


타인의 취향을 가르치려 드는 행위는, 결국 타인이 오랜 시간 자신의 기질과 경험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세계의 도면을 백지화시키는 것과 같다.


결국, 가장 강력한 취향의 안내자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에게 가장 완벽하게 들어맞는 질서 속에서 아름답게 머물며 살아간다. 세상의 소란스러운 유행에 눈길을 주지 않고, 스스로 구축한 고요한 풍경 속에서 자신의 호흡을 유지할 뿐이다.


그 침묵의 풍경이 누군가의 곁에서 흔들림 없이 반복될 때, 마법은 일어난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중력에 이끌리듯 그 세계를 기웃거리고, 조심스레 그 질감을 흉내 내며, 마침내 그것을 나의 삶 속으로 번역해 낸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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