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연인을 개조하고 싶다는 구원자적 착각

사랑은 다른 것을 견디는 인내다

by 김삼월

우리는 흔히 사랑에 빠지는 순간, 나와 상대방이 영혼의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좋아하는 영화가 같거나, 즐겨 듣는 노래가 일치할 때 “이것은 운명이야!”하며 환호한다.


사랑의 초기 단계에서 ‘같음’은 서로를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자력이자, 이 넓은 세상에서 완벽하게 주파수가 맞는 한 사람을 찾아냈다는 안도감을 선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랑은 곧 ‘취향의 일치’라 믿는다. 그러나 이런 낭만적인 안개가 걷히고, 일상의 민낯이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낯선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나와 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꽤나 충격적인 일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는데,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연인을 본다거나, 혹은 나에게는 다소 유치한 콘텐츠를 보며 박장대소하는 그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당혹감을 느낀다. 단순히 ‘나와 선호하는 바가 다르다’는 사실을 넘어,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정체 모를 서운함은 왜 때문일까? 사랑하는 사람의 취향이 왜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사랑해서 불편하다



단순히 기호가 다르다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한 사람의 취향은 그 사람이 살아온 궤적, 그 사람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 등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영혼의 지문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취향을 부정하거나 깎아내리는 행위는 ‘단순한 평가’가 될 수 없다.


연인에게 "어떻게 그런 걸 좋아해?" 혹은 "진짜 촌스럽다"라고 내뱉는 순간, 우리는 상대방의 미적 기준을 넘어, 감정과 존재 자체를 건드리게 된다. 연인으로부터 취향을 거부당한 사람은 ‘자기 정체성’마저 부정당했다고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 나를 가장 잘 알아주리라 믿었던 연인에게 내 영혼의 가장 무방비한 부분을 거절당했을 때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다.


이러한 취향의 충돌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본질은 결국 ‘우위의 문제’로 연결된다. 연인의 취향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우리는 “별로야”라고 말한다. 이는 취향의 차이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심연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내 기준이 너의 기준보다 더 낫다”는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내가 즐기는 문화, 내가 선택한 음식, 내가 향유하는 취미가 상대방의 것보다 더 세련되고, 더 가치 있으며, 더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취향의 충돌은 결코 “너는 그걸 좋아하는구나, 나는 이걸 좋아해.”라는 평화로운 논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은근하고 교묘한 서열 싸움으로 번진다. 자신의 취향을 방어하기 위해 위축 혹은 반발하거나, 자신의 ‘수준 높은’ 세계로 상대를 끌어올리려는 계몽주의자가 되어버린달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미묘한 권력 투쟁 속에서, 관계는 서서히 비틀린다. 평등해야 할 연인 관계가 평가하는 자와 평가받는 자, 가르치는 자와 교정받아야 할 자로 나뉘는 순간, 사랑이 머물러야 할 자리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과 피로감이 스며들게 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면죄부를 쥐고 상대방의 고유한 영혼 위에 내 기준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폭력을 행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이중성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의 취향을 내 입맛에 맞게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일까? 사랑에는 기묘한 ‘이중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분명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보듬어 안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역설적으로, 사랑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상대를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나와 내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연인이 더 훌륭하고 세련된 취향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이면에는 연인을 나와 동일시하려는 심리가 깔려 있다. 내 연인의 취향이 곧 나의 안목을 증명한다는 무의식적인 허영심. 혹은 내가 이토록 좋은 것을 알고 있으니 네가 이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는 구원자적 착각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나의 취향을 권유하고, 은근히 강요하며, 그 사람이 내 세계로 넘어오기를 바란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선언과, 내 입맛에 맞게 상대를 개조하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주고 싶다는 ‘선의’는 종종 상대방의 고유성을 훼손하는 집착으로 변질되고, 결국 서로를 지치게 만드는 족쇄가 되어버린다.



적당한 거리의 기술



이 숨 막히는 취향의 줄다리기에서 벗어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한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분모를 통일해야 할 의무는 없다. 24시간 내내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취미를 공유해야만 완벽한 사랑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연인의 모든 취향을 나의 것과 합치려는 순간, 관계는 필연적으로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자신을 억누르며 맞춰야 하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상대를 끌고 가야 하는 것이 관계를 피로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단 모든 것을 섞어 하나의 색으로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교집합의 영역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고유한 영역을 명확히 나누고 인정하자.“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는 것은 함께하되, 각자의 방에서 서로 다른 장르의 영화를 보는 시간을 기꺼이 존중하는 것. 사랑은 완벽한 포개짐이나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다름을 해치지 않도록 세밀하게 조율된 거리감 위에서 유지되는 ‘아름다운 균형’이다. 그 적당한 여백 속에서 각자의 취향은 숨을 쉬고, 두 사람은 비로소 독립된 주체로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다.


취향이란 애초에 논리적인 이해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왜 민트초코를 그토록 좋아하는지, 왜 그 난해한 재즈나 락 음악에 열광하는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저 가슴으로 느껴야 할 뿐이다.



이해가 아닌 허용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더라도 “너에게는 그것이 기쁨을 주는구나”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내 기준에는 맞지 않지만, 나의 연인이 그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면 그 낯선 세계를 나의 우주 한편에 머물게 해줘야 한다.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그 다름을 내 삶의 테두리 안으로 허용할 수 있는가는 중요하다.


내 세계의 문을 열고 내가 결코 좋아할 수 없는 낯선 것들을 허락하는 마음. 그것이 어쩌면 성숙하고 깊은 사랑의 증거일 것이다. 결국 사랑은 같은 것을 좋아하는 능력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좋아하는 상태를 인내하는 것이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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