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왜 사람들은 선을 넘는가?

오지랖의 윤리학 2

by 김삼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삶 앞에서 오지랖을 부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말들을 주고받는다. 그중에는 안부를 묻는 다정한 인사도 있지만, 종종 상대의 영역을 무례하게 침범하는 불청객 같은 말들도 섞여 있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그렇게 하면 나중에 후회해.” 등 명절의 거실에서, 혹은 직장의 탕비실에서,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지인 사이에서 이러한 폭력적인 참견은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선을 넘는 행위가 대부분 선의라는 번지르르한 포장지를 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타인의 고유한 삶의 궤도에 기어코 개입하도록 만드는 걸까? 선의로 포장된 그 참견의 이면에는 과연 어떤 민낯이 숨겨져 있을까? 타인의 삶을 향한 집요한 개입, 그 기저에 깔린 심리적 동인과 권력의 역학을 해부해볼까 한다.



왜 사람들은 선을 넘는가?



사람들은 왜 타인의 삶에 그토록 집요하게 개입하려 할까.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십중팔구 “타인을 위해서”, “착한 마음으로 돕고 싶어서”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오지랖은 타인을 향한 헌신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방어하고 강화하려는 단순히 이기적인 심리적 기제에 불과하다.


1) 취향의 우월감

오지랖의 기저에는 자신이 타인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오만이 깔려 있다. “나는 더 나은 선택을 안다.” “나는 인생의 정답을 깨달았다.”는 환상이다. 특히 자신이 먼저 경험한 영역(취업, 결혼, 육아, 재테크 등)에서 사람들은 전문가 행세를 하며 타인의 삶을 내려다보려 한다. 이때 오지랖은 상대를 가르친다는 명목하에 스스로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받는 ‘권력 놀이’가 되어버린다. 조언의 탈을 쓴 욕망은, 상대방을 통제하는 무기로 변화한다.


2) 불안의 전이

오지랖의 가장 은밀하고도 강력한 동인은 불안이다. 사람들은 종종 타인의 선택이나 취향에서 자신이 불편해질 때 오지랖을 발동한다. 예를 들어, 결혼과 출산을 당연시하는 집단에서 누군가 비혼과 딩크(DINK)를 선언하고 매우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할 때, 기존의 삶의 방식을 따르던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불안감에 휩싸인다. “혹시 내가 했던 선택이 틀린 것일까?”, “저렇게 사는 것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 중 하나라면, 지금의 나는 진정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걸까?”라는 위협을 느낀다.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오지랖은 시작된다. 타인의 삶이 잘못된 것이라고 규정하기 시작하면서, 타인을 ‘자신의 궤도(취향)’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타인의 독특한 선택은 기준을 흔드는 것이기에 나쁘다.’라는 말은 사실 논리적인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하지만 타인이 불행해야만, 혹은 타인이 나와 같은 궤도를 돌아야만이 나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당위를 요구한다.


3) 통제 욕구

세상은 본질적으로 무질서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이 혼돈 속에서 통제력을 잃었다고 느낄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인간은 타인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듦으로써,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대한 세상 속에서, 내 조언 한마디에 행동을 바꾸는 타인은 내 통제력의 훌륭한 증거가 된다.


“오지랖은 타인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정렬시키려는 것이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이상적인 질서(취향)에 맞춰 타인들의 삶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고 정렬하려는 강박.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행동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마음. 그것이 바로 오지랖이 가진 민낯이다.



오지랖의 구조와 폭력성



이러한 오지랖의 심리적 동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매우 친숙하고 기만적인 언어들로 나타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오지랖들은 대개 매우 평범하고 심지어 다정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언어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타인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다.


1) 미적 오지랖: “그 옷 별로야.”

이는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오지랖이다. 타인의 신체와 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방식은 가장 사적이고 고유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타인의 미적 기준을 평가한다. 나의 미적 기준이 너의 미적 기준보다 우월하다는 오만함은, 결국 상대의 취향을 납작하게 누르고 자신의 취향을 덧씌우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2) 예언적 오지랖: “그렇게 살면 나중에 후회해.”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서 흔히 듣게 되는 이 말은 사실상 협박에 가깝다. 직장을 그만두고 꿈을 좇으려는 사람에게, 혹은 결혼을 미루고 자신만의 삶을 즐기려는 사람에게 주로 던지는 이 말은, 발화자 자신의 두려움이 투사되어 있다. 자신이 선택하지 못했던 길을 걷는 사람을 보며 느끼는 불안감을 ‘후회’라는 예언적 언어로 포장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미래를 인질로 삼아 현재의 선택을 통제하려는 교묘한 수법이 된다.


3) 면죄부적 오지랖: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오지랖들 중 가장 완벽하고도 악랄한 방식이다. 오지랖을 시전 하는 순간 발생하는 모든 윤리적 책임을 면제받으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면죄부적 오지랖의 공통 구조는 ‘너를 위한다’(이타심으로 포장된 명분) + ‘내 취향 기준’(실제 목적)이다. 이 구조가 폭력적인 이유는 수신자에게 부채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이 조언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거절할 경우, 순식간에 ‘나를 위해주는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다. 즉, 발화자는 선한 구원자의 위치를 점유하고, 청자는 그것을 무조건 수용하거나, 혹은 선한 이타심을 튕겨내는 악역이 된다. 이러한 오지랖 앞에서 타인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긴 채 철저히 무력해진다.



오지랖의 경계설정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과 완벽하게 단절된 채, 각자의 섬에 갇혀 살아가야 하는가? 공동체의 온기나 연대는 완전히 거부해야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지랖을 배제한다는 것이 인간관계를 무조건 단절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성숙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엄격한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입이 허용되는 예외적 상황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타인의 선택이 자신이나 타인에게 명백한 피해를 줄 때이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해악금지의 원칙’처럼, 개인의 자유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만 보장된다. 누군가 심각한 중독에 빠져 자신을 파괴하거나, 타인의 권리에 해를 가하는 상황이라면, 이때의 개입은 오지랖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이 된다.


둘째, 타인이 명시적으로 도움이나 조언을 요청했을 때이다. 즉,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의 취향이나 결정에 대해 확신을 잃고,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을 때이다. 이때의 개입은 일방적인 침투가 아니라 상호 동의에 따른 것이 된다.


“개입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현대 사회에서 ‘윤리’라는 단어는 무엇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을 하지 않고 물러서는 것에 맞닿아 있다. 타인의 삶이 나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 기이해 보이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취향과 철저히 어긋나 불편함을 유발할지라도, 한 발짝 물러서서 단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필요하다.


거리 두기는 무관심이나 냉소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라는 세계가 나의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인정하는 가장 뜨겁고 성숙한 형태의 연대다. 타인의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숭고한 중용 그 자체인 것이다.



우아한 침묵



‘우아한 침묵’. 타인의 삶이 나의 취향이나 기준과 다를지라도, 그것을 함부로 교정하려 들지 않는 태도.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통제 욕구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타인에게 투사하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 내는 성숙함.


이는 결코 인간에 대한 애정을 거두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를 나와 동등한 이성을 가진 독립적 주체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연대를 시작할 수 있다. 섣부른 조언을 삼키고 한 걸음 물러선다면, 그 빈 공간에는 각자의 고유한 취향과 삶의 방식이 자유롭게 만개할 수 있는 여백이 생긴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삶에 불쑥 뛰어들어 정답을 쥐여주려는 오만을 버리자. 대신, 그가 자신만의 오답을 기꺼이 경험하며 스스로 삶의 궤도를 수정해 나갈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봐 주자.”


타인의 우주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 진정한 취향의 존중은 바로 그 한 걸음의 물러섬에서 시작된다.


월, 목 연재
이전 22화22. 오지랖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