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스레덴 야생일기
입을 귀에 걸고 신나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 대신 다섯의 사내는 여섯의 침대를 준비해 주었다. 창 밖은 여전히 밝았다. 자정이다.
꼭대기 침대에는 6개의 침구가 놓여있었다. 당고머리 사내는 침대가 모두 펴지자 리넨과 베개를 아래층으로 배분했다. 복도에서 낑낑대며 베개시트를 끼우고 나니 사내들이 손짓으로 무언가 요청한다. 문 오른쪽에 놓여있던 사다리였다. 내가 사다리를 연결하자 우리 방의 취침준비는 완료되었다.
나는 사다리를 밟고 2층 침대로 몸을 집어넣었다. 고개를 들고 앉을 수 없을 만큼 협소한 자리였지만 그런 것은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나는 그저 신이 난 상태였으니까. 나를 둘러싸던 긴장은 도파민이 모두 쫓아낸 지 오래였다. 지금은 그저 누운 알파벳 D처럼 몸을 한껏 굽힌 채 헤실헤실 웃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가 3층 바닥, 그러니까 내 천정에 머리를 쿵 박으면 또 그게 즐겁다고 웃는 거다. 미쳤다. 꺄르륵. 재밌다. 신난다. 쉴 새 없이 폭음을 내뱉는 열차소리 틈에 내 웃음소리가 끼어들었다.
사내들은 내가 웃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옷을 한 겹씩 벗으며 취침을 준비했다. 오늘도 다들 살갗을 드러내는구나. 또 나만 까만 옷 둘러 입고 자는 거지? 불공평하다. 갈아입을 옷도 벗을 옷도 없는 나는 하얀 이불을 몸에 둘둘 감싸고 누웠다. 말똥말똥. 자정을 넘긴 시간이지만 정신은 잠들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도파민이 졸음도 같이 쫓아내 버렸나 보다. 어느새 사방에서 골골대는 다섯 개의 숨소리. 나는 동그란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그 소리를 한참 귀에 담았다.
덜컹덜컹. 끼익. 쿠르르르릉. 소란에 눈을 뜨니 선로 위. 기차는 부지런히 달리는 중이었다. 뜨거운 햇살이 뒤를 따라오며 나를 반긴다. 쟤 어젯밤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는 척 새로운 아침을 눈에 담아본다. 일곱 시 반이다. 깨지도 않고 늘어지게 잘 잤다.
비몽사몽 한 눈으로 주변을 살핀다. 대각선 아래 민머리 두목은 일찌감치 일어나 스토쿠에 빠져있다. 옆자리 사내는 등을 보인 채 고로롱고로롱 수면을 헤엄친다. 3층의 당고머리 사내들은 주섬주섬 바지를 챙겨 입는다. 차례로 사다리를 내려오더니 복도 쪽 창가에 고개를 내밀고 바람을 쐰다. 아래에서 잠들었던 도미닉은 내 얼굴 앞에 고개를 쏙 내밀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굿모닝. 오늘은 비가 온다네. 그래도 내일은 맑을 예정이래. 그가 전해오는 날씨소식에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들판 위로 뭉게구름이 넓게 펼쳐져있다. 완벽하게 생소한 아침이었다.
사내들은 열 시 즈음 키루나역에서 하차했다. 어제는 분명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무서웠는데 오늘의 이별은 왜인지 아쉽기만 하다. 정이 많아 문제지. 왠지 허전해진 방. 도미닉과 나는 그들의 흔적을 정리한 뒤 오늘의 일정을 상의했다.
숙소랑 마트, 거리가 좀 있던데. 체크인 전에 마트 다녀오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것 같아. / 좋은 생각이다. 아비스코역 앞에 바로 마트가 있어. / 그 역은 숙소랑 멀 텐데? 나는 아비스코 다음 역으로 예매했어. 나랑 같이 숙소 앞에 내려서 짐을 두고 마트에 가는 게 어때?
아비스코에는 두 개의 역이 존재한다. 마트와 가까운 아비스코역, 숙소와 가까운 아비스코투리스트역. 우리는 아비스코역에 닿기 직전, 서로 예매한 도착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비스코역에 내려 장을 보는 것이 동선 상 유리했지만, 나는 도저히 이십오 킬로 배낭에 무게를 더 할 자신이 없었다. 급하게 지도를 보여주며 도미닉을 설득했다. 제발 짐 두고 가자. 응? 고맙게도 그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휴. 다행이군. 이층에 올려둔 베개를 집어 소파 위에 벌러덩 누웠다. 그러다 문득. 이런, 우리 나름 초면인데 너무 내추럴한가? 아니지. 평소의 나라면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을 테지만 오늘처럼 씻지도 못한 상태에서 지킬게 얼마나 더 있단 말인가? 흘끗. 슬쩍 쳐다본 도미닉은 부스스한 몰골의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덤덤히 창 밖의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며칠이나 함께 할지는 모르겠지만, 걷다 보면 서로 더 한 몰골도 보이고 말 거야. 이 정도는 양반이지. 애써 합리화를 마치고 나는 눈을 슬며시 감았다. 그리고 온몸으로 요란스러운 기차를 느꼈다. 그리고 곧.
끼이익——. 기차 레일에 따라 거칠게 흔들리던 몸이 멈췄다. 그래 이제야 좀 편안하다. 웅크린 몸을 쭈욱, 기지개를 켜는데 그가 복도 너머 창 밖을 살피더니 급하게 말했다. 우리 내려야 해. 아비스코투리스트역이야. 뭐라고? 젠장. 몸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한 채 바닥을 여기저기 더듬었다. 널브러진 신발을 찾아 급하게 발을 집어넣고 온몸의 힘으로 들어 올리던 배낭은 순식간에 한쪽 어깨에 들쳐멨다. 작은 배낭은 키링처럼 손목에 걸었다. 카메라 스트랩을 아무렇게나 목에 걸고 쿵쿵, 온몸을 부딪히며 복도를 나섰다. 헐레벌떡 열차에서 내리자 다른 차원인 듯 고요하고 촉촉한 공기가 피부에 스민다. 힘이 쭈욱 빠지며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배낭을 저항 없이 툭 내려두었다. 괜스레 손등으로 관자놀이를 훑었다. 고개를 드니 눈에 맺히는 문자.
아비스코 투리스트역. 8개월 간 상상했던 그곳에 내 두 발이 닿아있었다.
알고 나면 더 재밌고 유용한 추가정보
+ 사내들은 스웨디시의 암벽 클라이머였다.
+ 아비스코(abisko) 역 : 마트와 가깝다.
+ 아비스코투리스트(abisko turist) 역 : 숙소와 가까우며 쿵스레덴 출발지점이다.
+ 현재 분량조절 실패 중이다. 작자는 빨리 하이킹 썰을 풀고 싶다. 이대로면 3년 동안 연재하게 생겼다. 젠장.
insta @kim.sann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