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스레덴 야생일기
도미닉은 화가 났는지 텅 빈 6인실로 들어가서 문을 쾅 닫고 커튼을 쳤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그 방 안에 함께였다.
그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좌석을 예약해도 먼저 앉으면 그만이라는 거다.
야, 그런 게 어딨어. 니 자리라고 해야지. / 말해도 안 통해. / 여기는 왜 들어온 거야? / 나도 자리 빼앗겼으니 빈 곳에 앉은 거야. 너도 그냥 여기에 있어.
내가 여기에? 때마침 티켓 검표원이 우리 방에 찾아왔다. 그녀는 우리 티켓을 스캔한 뒤 좋은 여행 하라며 싱긋 웃고는, 별말 없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에라 모르겠다. 자리 주인 나타나면 내 자리로 돌아가지 뭐. 푹신한 좌석에 몸을 푸욱 기대며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16시간. 흠, 어색한 공기가 우리를 감쌌다.
지익. 지갑 열리는 소리. 적막을 깨고 그가 내 앞에 동그란 은색 동전을 내밀었다. 먼지 없이 빛나는 동전의 한 면에는 왕관과 숫자 1이 또렷하게 새겨있었다. 체코에서 행운을 상징하는 럭키 크라운이라고 한다. 그는 가진 행운을 선뜻 건넸다.
이거 너 줄게. 쿵스레덴에서 좋은 일이 있을 거야. / 진짜? 나 줘도 되는 거야? 고마워. 절대 안 잃어버릴래. / 그래 절대 잃어버리지 마. 하나뿐이니까.
덕분에 행운이 다시 함께 걷는다. 내 손에 쥐어진 크라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그에게 또 다른 행운을 가져다주겠다 약속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덜컹. 그때 기차가 멈췄다. 창 밖엔 수많은 짐과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기차는 그들을 모두 태우려는 듯 오래 정차했다. 혼잡한 소리가 바쁘게 복도를 지나다닌다. 그러다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어, 여기 자리 있네. 우리 넷인데, 같이 앉아도 되죠?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들이 문 틈으로 방 안을 살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치아를 드러내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움찔. 물론이죠. 흐트러진 짐을 내 쪽으로 바짝 당기며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들은 밧줄과 헬멧과 곡괭이 같은 자루를 챙겨 들어왔다. 정수리에 당고머리를 한 사내가 팔 힘으로 천정 쪽 침대에 오르더니 순식간에 많던 짐을 방 안 곳곳에 숨겨버렸다. 바닥에 뒹구는 나의 배낭까지도. 음, 저기 내 칫솔 들어있는데. 내일까지 양치는 못하겠구나.
정리를 마치자 더욱 어색해진 공기. 등 뒤로 식은땀. 낯선 땅 위에서 사내 다섯과 열몇 시간 합숙이라니. 엄마가 알면 기절할 노릇이다. 도미토리 혼숙을 많이 했지만 이 상황은 또 달랐다. 몸이 긴장으로 빳빳해지는 게 느껴졌다. 티가 나면 불리한데. 누군가와 연락이라도 하며 불안을 재우고 싶었으나 원망스럽게도 기차는 통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지 두 시간이라도 더 대화를 나눈 도미닉을 믿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불안을 눈치챘을까, 옆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켜주었다. 나는 그 옆에서 일기를 쓰고 체코어를 배우다가 창가에 기대 잠에 들었다.
그동안 사내들은 번갈아가며 자리를 비우더니 아예 사라졌다가, 늦은 밤이 되니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잠든 나를 보며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눈을 뜨고 상황을 살피니 내가 방해가 되는 모양. 비몽사몽. 작은 배낭과 일기장을 챙겨 복도로 자리를 피해 줬다. 그들은 내가 자고 있던 좌석의 등받이 쿠션을 떼어냈다. 꺼내둔 팔걸이도 다시 집어넣었다. 등받이를 힘껏 들어 올린다. 그리고 딸깍. 뭐야, 의자가 순식간에 침대로 바뀌었다.
졸음에 잡아먹히던 내 두 눈이 순식간에 땡그래지며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우와!!! 복도에서 방방 뛰며 흥분한 나를 보며 도미닉은 웃었다.
이런 기차 처음이야? / 응!! 대박이다. 이거 뭐야? 나는 의자에서 자는 줄 알았어. 와 이런 게 침대칸이구나. 너무 신기하다!!!
입을 귀에 걸고 신나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 대신 다섯의 사내는 여섯의 침대를 준비해 주었다.
창 밖은 여전히 밝았다. 자정이다.
알고 나면 더 재밌고 유용한 추가정보
+ 기차에는 와이파이와 상점이 없었다.
+ 럭키크라운은 한화 60원이다.
+ 나는 사내들을 처음보고 러시아 마피아로 오해했다.
+ 친구끼리 건네는 체코 인사말 : 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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