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스레덴 야생일기
꿈꾸던 쿵스레덴의 시작점, 아비스코는 참으로 멀었다. 스웨덴 알란다 공항에서 장장 17시간 기차를 타야 닿을 수 있는 북쪽 끝자락이니 말이다.
멀기만 한가, 비싸기도 하다. 이 놈의 북유럽. 나는 출국 전 얼렁뚱땅 발급받은 ISIC 학생신분으로 티켓을 결제했다. 한화 9만 원. 기차는 침대칸과 좌석칸이 있었지만 13만 원을 훌쩍 넘는 침대칸은 내게 사치였다. 4만 원이면 파스타가 몇 봉지야? 한 달 내내 먹고도 남겠네. 돈보다 체력이 부유한 나는 17시간을 꼿꼿하게 앉아 이동하기로 한다.
17시간이라. 기차에 매점은 있으려나. 공항은 틀림없이 비싸잖아. 한국을 벗어난 뒤 왕성해진 식욕이 고개를 들어 묻는다. 없으면 곤란한데, 보채는 식욕에 늦은 밤 부랴부랴 숙소 냉장고를 살펴본다. 먹다 남은 치킨조각, 구운 감자, 바질페스토, 또띠아. 오케이, 정했다. 치킨감자바질부리또. 있는 재료를 전부 넣고 4개의 치킨감자바질부리또를 만들었다. 남기는 것 없이 재료를 다 쓰다니, 나 모험가보다 살림꾼이 먼저 되는 거 아닌가 몰라.
든든해진 마음으로 12인실 도미토리로 돌아왔다. 어질러진 짐을 바라본다. 흠, 분명 욕심은 모두 두고 왔는데 말이다. 배낭은 왜 25킬로일까? 이대로면 출발하고 몇 걸음 걷다 항복할 것이 분명하다. 배낭에 든 물건을 바닥에 전부 펼치고 생존물품 토너먼트를 개최했다.
1라운드 샴푸 vs 폼클렌징. 샴푸로 얼굴 씻는 것보단 폼클렌징으로 머리 감는 게 낫겠지. 그래, 샴푸는 여기서 안녕. 2라운드 속옷 비누 vs 폼클렌징. 속옷도 폼클렌징으로 세척하자. 비누 안녕. 3라운드 바나나보트 선크림. 이건 뜯지도 않았는데. 4라운드 원피스. 원피스? 이런, 몰래 챙겨 온 욕심이 레이더망에 걸려버렸다. 흥, 원피스는 절대 못 버려.. 날이 좋으면 입으면 되고, 무게도 얼마 안 나간다고. 이 정도 무게는 내가 충분히 더 짊어질 수 있어. 냉철하고 실리적인 판단에 강한 나이지만 아무튼 원피스는 함께 가기로 한 거다.
아비스코에 택배 서비스가 있던가? 택배로 헤마반까지 짐을 다 부쳐버리면 될 일이잖아. 몰라 몰라 가서 생각해. 솎아낸 짐을 전부 다시 배낭에 넣고 지퍼를 부욱 잠갔다. 결국 식량으로 더 묵직해진 배낭을 메고 알란다에 도착했다.
기차탑승까지 세 시간. 오늘의 목표는 지출 없이 아비스코에 닿는 것이다. 공항 의자에 배낭과 나란히 앉아 차가운 부리또를 한 입 물었다. 포크로 대충 뜯은 닭가슴살의 결이 부드럽게 씹혔다. 감자는 포슬하다가 아삭거렸다. 탈이 나면 안 될 텐데. 무던한 내 위장을 믿어본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환전소에서 500 크로나(65,000원)를 인출했다. 현금 쓸 일이 거의 없다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지. 가방 깊숙이 현금을 밀어 넣고 배낭을 고쳐 멨다. 승차장이 어디더라. 관광안내소에 물어 공항과 연결된 기차역을 찾았다. 직원에게 티켓을 내민다.
아비스코에 가려고요. / 기차가 출발하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어. 이따 오면 게이트로 보내줄게. / 언제가 적당한가요? / 십 분 전에 와.
시간이 붕 떴다. 주변 기념품 숍을 돌아보려다 거대한 배낭에 마음을 접고 가까운 좌석에 앉았다. 파워가 있는 좌석이라니, 방랑자에게 적합하다. 충전기를 꽂아두고 멍하니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끼익, 의자 끌리는 소리. 누군가 말을 건다. 고개를 돌려보니 외국인.
나에게 묻는다. “안녕, 너 혹시 하이커야?”
뭐야, 어떻게 알았지?
알면 재밌고 유용한 추가정보
+작자는 6개월 간 세계모험 중이다. 스웨덴 알란다 공항에는 출국 13일 차에 닿았다.
+쿵스레덴은 주로 아비스코(0km)에서 출발하여 헤마반(460km)에서 끝이 난다.
+기차는 VY어플로 예매했다. 블로그에 정보가 있다.
+키루나 공항을 이용하면 이동시간 단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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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아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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