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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산난 Sep 03. 2024

Ep7. D-1

쿵스레덴 야생일기



힘이 쭈욱 빠지며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배낭을 저항 없이 툭 내려두었다. 괜스레 손등으로 관자놀이를 훑는다. 고개를 드니 눈에 맺히는 문자. 아비스코 투리스트역. 8개월 간 상상했던 그곳에 내 두 발이 닿아있었다.






나는 그간 수많은 아비스코를 상상해 봤다. 기상이변으로 눈이 소복이 쌓여 하이커의 발길이 뚝 끊겼다거나, 우연히 그날따라 나만 기차역에 덜렁 내려 마을 전체가 썰렁하다거나, 또는 삐죽삐죽 솟아있는 야생화와 그 사이의 곰발자국을 발견하고 벌벌 떤다거나.. 냉랭한 외국인들 사이에 작고 외로운 나라던가. 아무튼 나는 최악에 가까운 아비스코를 상상하며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긴장이 참 무색했다. 아비스코는 공기부터 부드럽게 나를 감싸주었다. 역무원은 모든 하이커가 안전히 내릴 때까지 기다려주고 눈을 마주치면 좋은 여행 하라는 듯 싱긋 웃어주기도 했다. 역에는 알록달록 주렁주렁 무언가 매달린 배낭이 수없이 많았다. 대부분은 어림짐작해도 이십 킬로는 우습게 넘길 배낭들이었다. 쿵스레덴, 정보가 그리도 없던데 다들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나 몰라. 주변을 살피던 두려움이 슬금 내 등 뒤로 숨는다. 제법 괜찮을지도 몰라. 바닥에 내려두었던 배낭을 짊어지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 근처에 갔을 때 나는 내가 모르는 축제라도 하는 줄 알았다. 배낭 없이 강아지와 산책하는 데일리하이커, 이제 출발하려는 듯 매무새를 다듬거나 혹은 방금 하이킹을 끝낸 듯 개운한 표정의 헤비백패커, 트레킹 폴 대신 서로의 손을 잡고 걷는 노부부, 자유롭게 마당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리셉션 건물 앞에 정렬된 수십 개의 트레킹 폴, 복도에 줄지어 서있는 큼직한 배낭. 나는 예상치 못한 사람냄새에 내내 어리둥절해야 했다. 이상하다. 내가 수집한 정보는 이렇지 않았는데.


애써 침착하며, 로비 한편에 배낭을 내려두었다. 그리고는 숙소에서 운영하는 숍으로 슬금 빨려 들어갔다. 이곳은 굿즈 참새에게 너무 가혹한 방앗간이었다. 아비스코나 쿵스레덴이 새겨진 와펜과 카라비너는 물론이고 용도를 알 수 없지만 생소해서 갖고 싶은 호루라기, 볼 줄도 모르는 나침반, 괜히 하나 더 챙기고 싶은 스푼과 앞접시, 사냥꾼들이 챙겨 다닐 듯한 거대한 우드 손잡이의 나이프까지. 가방에서 꺼내면 너 진정한 모험가구나! 라며 감탄을 이끌 법한 멋스러운 아이템에 발을 동동 구르며 구경을 하는데 도미닉이 내 정신을 붙잡아왔다.


여기 있는 것들은 조금 비싼 것 같아. 근처 마트에 같은 것을 더 저렴히 팔 것 같으니까 마트에 가보자.


이성적인 녀석. 나는 아직 이 숍을 절반도 구경하지 못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따라 이 킬로 거리의 마트로 향했다. 로비에 둔 가방은 러기지룸에 보관했다. 마트에 가는 동안 그는 체코의 이천킬로 하이킹 코스를 추천해 주었다. 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니. 나는 떨떠름한 호기심으로 코스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궁금하긴 하다. 확실히 더 튼튼해질 필요가 있겠어.


마트에서는 긴가민가한 반가움을 마주했다. 패키지는 달랐지만 분명 삼양라면이었다. 스웨덴 마트에서 한국 라면이라니. 나는 도미닉을 붙잡고 신이 나서 자랑했다.


도미닉! 이거 한국라면이야! 너 라면 알아? / 오 차이니즈 누들이네. 나 아시아마트에서 자주 사 먹었어. / 아니 차이니즈 누들이 아니라 한국라면이라고. / 비슷한 거 아니야? 우리는 뭉뚱 거려 차이니즈 누들로 불러. 맛있겠다. 오늘 저녁으로 먹어볼까 봐. 너는 안 사?


나는 이미 노르웨이의 아시아마트에서 가장 저렴한 베트남누들로 배낭을 빵빵하게 채워온 상태였다. 라면 한 봉지에 백이십 그램. 겨우 백 그램을 고민하는 지경이라니. 내 배낭은 이미 만석이었지만 트레일 위에서 한국의 맛은 쉽사리 포기되지 않았다. 여차하면 바로 먹어치우지 뭐. 삼양라면 한 봉지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나는 그 외에도 내일 아침으로 먹을 소시지와 또띠아 소스, 삼백 그램의 판초콜릿 두 개, 스쿱으로 퍼담는 젤리를 구매했다. 이만오천 원. 오른쪽 어깨의 장바구니가 제법 묵직했다.


내 배낭은 오늘도 무거워지기만 하는구나. 걱정에 배낭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 도미닉은 젤리봉투를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눈을 굴려 파란색 스머프 젤리를 집었다. 찐득한 맛이었다. 리셉션에 가자마자 택배 문의부터 해야겠어. 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생각했다. 리셉션의 직원을 찾았을 때 그녀는 나를 숍으로 안내했다. 다시 들어온 방앗간에서.


저기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 택배 서비스가 되나요? 헤마반이나 알란다 공항까지 짐을 부치고 싶어서요. 작은 에코백 사이즈예요. / 헤마반이요? 글쎄, 잠시만요.


그는 곤란한 듯 서류철을 뒤적거렸다.


어쩌죠. 우리는 니칼루옥타까지만 택배를 보낼 수 있어요. / 니칼루옥타요? 혹시 비용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 사이즈와 무게에 따라 금액 차이가 큰 편이라.. / 어바웃 비용이라도요. 에코백 사이즈에, 사 킬로 내외일 것 같아요. 최대비용을 말씀해 주시면 참고할게요. / 이 전 데이터로 봤을 때 그 정도는 사백 크로나에서 팔백 크로나 정도예요. 강조하지만, 실제 비용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팔백 크로나. 십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택배 하나 부치는데 십만 원이라니. 게다가 니칼루옥타는 내가 가려는 동선에서 벗어난 위치였다. 나는 그에게 몇 번이고 되물으며 내가 놓친 정보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니까, 니칼루옥타까지, 팔백 크로나, 혹은 그 이상이라는 거죠? 공항까지 택배는 보낼 수 없는 거고요. 네, 맞아요.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로비에 돌아와 앉았다. 도미닉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진 상태였다. 저 멀리 들리는 대화소리가 녀석일까. 아무렴 내 머릿속은 온통 짐 생각뿐이었다. 막 입을 티셔츠를 두 벌 챙겨 왔는데 한 벌은 버려야겠지. 도미닉이 돌아왔다. 선크림 대신 모자를 쓰고 다니면 피부가 덜 타지 않을까? 세 시가 되어 체크인 키를 받았다. 양말이 네 개나 필요한가? 배정받은 방에 배낭을 내려둔다. 한국에서 챙겨 온 그래놀라는 내일 아침으로 먹어치우자. 샤워용품을 챙겨 공용샤워실로 향했다. 곧 버릴 샴푸, 오늘 실컷 쓰지 뭐. 풍성한 거품으로 온몸을 북북 닦았다. 비상용 휴대폰은 정말 괜히 챙겨 왔네. 침대로 돌아와 벽돌 같은 보조배터리 2개를 충전했다. 먹지도 않는 사람이 식량은 왜 이리 많은 거람. 남은 부리또를 우물우물 목구멍으로 넘긴다. 등산 스틱은 평소에 쓰지도 않는데 이번에도 짐만 되는 거 아니야? 원피스는 구석에서 침을 꼴깍 삼켰다.


경량우산 하나 덜어내고는 무게가 좀 줄었나 배낭을 들었다 놨다. 정말이지 곤란했다. 도무지 더 뺄 것이라곤 없었다. 배낭 점검만 두 시간 째였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걸어보기로 했다.

알고 나면 더 재밌고 유용한 추가정보

+ 체코 2000km 하이킹 : stezka ĆESKEM

+ 아비스코 마트는 야크빅(300km 지점) 전 마지막 노멀마트이다.

+ 삼양라면은 8.9kr (한화 1,200원)이다.

+ 버린 물품 : 샴푸 400ml, 선크림 236ml 새것, 오일리무버 100ml, 티셔츠 두 벌, 팬티 한 장, 그래놀라, 비스킷 10알, 경량 우산, 영수증 쪼가리

+ 숍에서 구매한 것 : 이소가스 210g, 쿵스레덴 손 지도, 코코아파우더 2팩, 아비스코 카라비너



insta @kim.san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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