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스레덴 야생일기
경량우산 하나 덜어내고는 무게가 좀 줄었나 배낭을 들었다 놨다. 정말이지 곤란했다. 도무지 더 뺄 것이라곤 없었다. 배낭 점검만 두 시간 째였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걸어보기로 했다.
일곱 시에 눈이 떠졌다. 꺼내둔 세면도구를 챙겨 욕실로 향했다. 다섯 번 정도 펌프를 푸욱푸욱 짰다. 공용샤워실은 버튼을 삼십 초마다 눌러줘야 하는 타이머형이라 매우 불편했지만, 오늘 저녁부터는 이조차 사치일 것이다. 다음 샤워는 언제려나. 아쉬운 마음에 괜히 몸을 여러 번 더 헹궈냈다. 얇은 스포츠 타올로 머리를 털어내며 방으로 돌아오는 길. 출발 전 연락을 남길 메신저 리스트를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름, 엄마. 이제는 진짜 미룰 수 없겠지. 출국 직전까지 얼버무린 여정을 말하기 위해 엄마에게 보이스톡을 걸었다. 연결음만 뚜루루 뚜루루. 엄마는 바쁜지 통화가 되지 않았다. 오 맙소사. 이렇게 출발해 버리면 내일 즈음 스웨덴 숲 속에 나를 찾는 헬리콥터 떼가 출동하고 말 텐데.
우리 여사님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걱정인형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중학생이던 내가 영어수업을 듣느라 전화를 받지 않자 내가 없어졌다며 신고를 한 업적이 있는데, 내가 스웨덴에서, 그것도 일주일이나, 연락이 두절된다면, 그때는 정말 온 세상이 힘을 합쳐 나를 찾게 될 것이었다. 오, 나는 산을 타다가 기사 일면을 장식하고 싶지 않았기에 부랴부랴 그녀의 걱정을 덜어낼 (그러나 아마 소용없을) 글을 남겼다. 엄마 미안, 실은 나 한 달간 스웨덴 북쪽 숲을 걸을 거야. 그런데 여기 통신이 안된다네. 일주일 뒤에야 마을에 도착해서 소식을 전할 수 있겠는데, 안전할 테니 걱정 마. 여기는 지금 백야기간이라 밤도 대낮 같아. 일기예보 보니까 일주일 동안은 일몰도 없대. 게다가 같이 걷기로 한 친구도 생겼어. 얘 말고도 하이커가 엄청 많아. 한국인만 잘 모르는 코스인가 봐. 통신이 되자마자 연락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나 믿지?
믿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요. 나는 이곳의 좋은 사실만을 예쁘게 포장했다. 차마 풀숲에 텐트를 치고 잘 것이라고, 오늘 밤부터는 비소식이 있다고, 베어 스프레이는 못 구했다고, 이곳에 대한 정보는 어제 우연히 구한 손 지도 하나뿐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엄마는 내가 편안한 길을 산책하듯 걷고 있다고 믿어주길 바랐다.
그다음 친오빠에게 연락했다. 엄마에게 전하지 못한 대부분의 내용을 남겼다. 그는 내게 이번이 전부가 아니니 너무 모험심을 발휘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고집깨나 부리는 내게 시기적절한 메시지였다. 나의 친구들과 여럿 지인에게도 연락을 남겼다. 다녀올게. 다녀와. 믿는다. 사람 조심해, 너무 믿지 마.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의 응원과 사람을 믿지 말라는 사람들의 조언도 새겼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일기에 남겼다.
‘ … 오늘 밤에 어떤 후기를 쓸지 모르겠으나 부디 화이팅이다 미나야. 입에 음식 많이 집어넣고 잘 출발하길 바라. 그리고 트레킹 폴.. 안 쓸 것 같으면 빨리 버려라. 아 하체가 벌써 떨리는군. ’
어제 사둔 소시지와 또띠아를 우물우물 씹는데 오늘따라 목구멍이 꽉 막혀있다. 안 먹으면 후회할 텐데. 두어 번 더 먹어보지만 도무지 넘어가지 않는다. 됐어, 이따 후회해도 소용없는 거다. 탄산음료를 들이켠 뒤 몸을 일으켰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다. 전장에 나가는 사람마냥 한껏 비장한 마음으로 방에 돌아와 여러 벌의 티셔츠와 속옷, 자질구리한 물품을 세면대 한편에 쌓았다. 십 수일을 미련하게 업고 다녔으나 결국은 다 버리고 마는구나. 모두 헌 것이라 그나마 다행이지. 위안하며 배낭을 멨다. 우윽, 묵직한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손에 쥐고 있던 비스킷 봉지를 세면대 옆에 내려두었다. 더는 무게를 더할 수 없어. 아쉬움을 달랠 몇 조각만 손에 쥐고 방을 나선다.
로비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나의 배낭을 보고 많이 무거운지 물었다. 입 아픈 소리를. 나는 외부의 행잉저울에 배낭을 걸었다. (배낭은 도미닉이 걸어줬다. 나는 들 수 없었기 때문에.) 무게는 이십 킬로. 카메라와 사코슈 백까지 포함하면 이십일 킬로인 셈이다. 이야, 오늘 안에 어깨가 망가지지 않으면 선방이겠는걸. 어깨를 걱정하며 손에 쥔 마지막 비스킷을 씹었다. 이렇게 금방 먹을 줄 알았다면 다섯 조각만 더 챙겨 나올걸. 우물우물. 그는 옆에서 내 무게에 놀라더니 내 양쪽 어깨끈을 팍팍 털듯이 당겨 꽉 조아줬다. 이렇게 하면 더 나을 것이라며. 고맙다. 근데 사실 큰 차이는 느끼지 못했어. 며칠 내로 땅에 눌러붙을까 걱정이 되었을 뿐. 나는 허리에서 무게를 받아주길 바라며 허리벨트를 꽉 조았다. 그리고 이제 출발하려는데,
있잖아. 저기에 폭포가 있는데 잠시 구경하고 갈래? / 응? 폭포? / 응. 어제 산책하다 발견했는데 보여주고 싶어서. 배낭 메고 잠시 다녀올 수 있는 거리야. 십 분이면 충분해.
그의 제안에 우리는 폭포로 향했다. 경사 없는 짧은 숲길을 지나자 콸콸대는 물소리와 함께 거대한 폭포가 나타났다. 오, 멋지긴 한데 눈에 폭포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온 신경이 벌써부터 뻐근해지는 어깨에 쏠렸기 때문이다. 가방을 내려두고 올 걸 그랬나. 체력안배를 해야 하는데 너무 무식하게 따라왔나 봐. 겨우 십 분 걸었는데 어깨가 이렇게 아프면 어쩌자는 거지? 오늘 적어도 일곱 시간은 더 걸어야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한 내 앞으로 그는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나는 입꼬리를 바들바들 떨며 웃음을 지었다. 찰칵.
저 앞으로 가면 뷰가 더 좋은데, 가볼래? / 오, 아니 아니. 난 괜찮아. 너 다녀와.
가만 보니 이 녀석 체력이 장난이 아니다. 아무렴, 삼 주 동안 여기를 걸으려는 사람치고 부실한 체력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래도 생각 없이 따라가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지금부터는 한 발자국도 허투루 움직이지 않으리라. 들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월에 갈라지고 변색된 목재 울타리, 그 위에 기댄 자작나무의 헌 가지들. 앞을 쉽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굽이진 통로. 원시로 빨려 들어갈 듯한 들머리였다. 저 너머는 정말 야생이라는 거잖아. 꿀꺽, 침도 나오지 않아 공기나 괜히 삼켜본다. 심장이 두근대는 건지 덜컹대는 건지 헷갈린다. 가만히 응시하다 보니 이제 와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 정말, 겁도 없이 여기 와버렸구나.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어디 한 번 갈 때까지 가봐라. 중도포기해도 뭐, 어쩔 수 없고. 출발하려는데 확인 못 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잘 다녀오라는 엄마의 연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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