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스레덴 야생일기
고개를 돌려 그를 불렀을 때, 녀석은 이미 가득 채운 보틀을 꿀꺽꿀꺽 들이키고 있었다. 걷는 속도만큼 행동력도 빠르구나. 맛이 어때? 딜리셔스. 첫 계곡 시음회가 성공적이다.
계곡을 아낌없이 들이키고 몇 발을 물려 엉덩이를 붙였다. 한 달간 이 길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고작 걷는 것 하나. 책임도 재촉도 없는 세상에서 마음껏 느긋한 휴식을 취한다.
바람이 솔솔, 맺혔던 땀방울이 마르고 꼬불머리가 이리저리 흩날린다. 코 끝에 풍기는 진한 샴푸 냄새. 이 향이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무르면 좋겠다. 씻지도 못할 텐데 참 모순적인 소망이군. 땀이 식으니 몸이 차다. 다시 움직이자.
배낭을 메고 걸은 아비스코의 초반 구 킬로는 숲과 들판의 반복이었다. 제주의 오름이 떠오르는 드넓은 초원이 양 옆을 가득 채우다가, 풀잎이 허리춤까지 높아지면 나도 모르는 새 울창한 숲으로 진입한다. 앞을 바라보면 자작나무의 굵은 가지에 붉은 페인트가 한 줄, 혹은 종아리 높이의 바위에 동그란 점이 찍혀있다. 자리 잡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쿵스레덴만의 표식이다. 성인 남성의 키보다 높은 위치에서 반복되는 붉은 엑스 표식도 보인다. 이는 눈이 일이 미터 이상 쌓이는 겨울 표지판이라고 한다. 나는 무성한 초록 사이 낮은 빨강을 따라 걸었다. 걷다 보니 표식이 없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어느 방향일까. 스포츠워치로 확인하려는데.
왼쪽으로 가면 돼. / 어떻게 알아? / 여기, 돌.
바닥에 황색 돌멩이가 점선을 그리듯 짧은 간격으로 놓여있다. 그가 말하기를, 쿵스레덴 코스를 벗어나는 길은 이렇게 돌멩이로 표시해둔다고 한다. 이걸 다 알아듣고 피해 간다고? 이 작은 돌멩이는 나에게 작은 충격이었고, 큰 낭만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발로 툭 차버리면 망가질 표식이었다. 나처럼 둔한 사람은 알아채지도 못할 불친절함이었고. 진입금지 테이프나 현수막 같은 확실한 방법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곳엔 작고 낮은 돌멩이다.
나는 이 불친절이 마음에 든다. 스포츠워치를 챙겼지만 갈림길에서 주위의 단서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 표식이 한국만큼 친절하지가 않다. 투박하달까. 덕분에 길 위에서 헤매는 시간이 길다. 그래도 발견하는 맛이 더 좋은 걸 어떡해. 집중하니 흐릿하던 단서가 보이기 시작한다. 느리지만 내 힘으로 찾아가는 기분을 느낀다.
적극적으로 막아두지 않은 길들은, 이 방향은 정해진 길이 아니지만 원한다면 가봐도 된다고, 결국 되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선택은 내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재촉 없는 길 위에서 나의 선택을 믿고 마음껏 헤맸다.
숲을 헤집고 나오니 큰 개울이 나타난다. 자갈밭에 뒹구는 거대한 배낭들. 먼저 지나친 하이커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개울가에 모여 허기를 달래고 있다. 쉬는 모습을 보니 어깨가 갑자기 아파온다. 내 배낭도 빨리 내려두고 싶군. 우리도 여기서 쉬고 가자.
그러자. 너도 지금 점심 먹고 싶어? / 아니.
몸이 힘들수록 식욕이 떨어지는 나는 밥 생각이 전혀 없다. 배낭을 근처에 대충 내려두고 물이 고이지 않은 자갈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또, 또 뻐근하게 뭉친 어깨. 몇 시간 더 걸었더니 목까지 긴장이 옮아 움츠러든 느낌이다. 양쪽 어깨를 번갈아가며 주물러 보지만 효과는 없다. 포기하고 개울에 시선을 옮긴다. 참 힘 좋은 물살이다. 갈증은 없었지만 흘러가는 물줄기를 한 컵 떠 마셨다.
이제 십 킬로 즈음 왔나. 지도를 열었더니 데이터가 잠시 터지다 먹통이다. 저런. 이제 정말 문명과 단절인가 보군. 휴대폰을 비행기모드로 전환하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항상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가 역할을 잃으니 불안이 찾아왔다. 어릴 땐 없이도 잘만 지냈는데.
나는 불안해하는 손을 이리저리 더듬다 주위에 널린 자갈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미닉이 옆에 자리를 잡더니 본인의 것을 쌓는다. 갑자기 경쟁이 붙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큰 자갈을 수집해 왔다. 녀석도 지지 않으려는 듯 옆에서 평평한 돌을 골라낸다.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며 무너지는 자갈을 몇 번이고 다시 쌓았다.
자갈 쌓느라 삼십 분이 지났다.
알아 두면 더 재미있고 유용한 추가정보
+ 붉은 페인팅은 여름길 / 엑스자 표시는 겨울길로 칭한다.
+ 겨울길은 여름에 따라가면 길이 끊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얼지 않은 개울 등) 페인팅을 따라가자.
+ 앞쪽 자갈탑이 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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