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 대하여

by 김산난



25.09.04 20:02

흔히들 p와 j로 나누는 주제,

계획에 대하여

어디까지 계획하십니까?



나는 스무 살 즈음에는 엄청난 계획 중독자였다.

(계획 수집이라고도 표현하겠음)

매일 메모장을 열어 이번 달엔 무슨 일을 할 거고

다음 달엔 어떤 거, 그래서 돈이 이만큼 모이면

그땐 이걸 해야지. 저걸 해야지.



계획으로 꽉꽉 채워지는 캘린더를 보고 있자면

그렇게 뿌듯하더랬다.

그리고 난 그런 나를 좋아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 시리즈도 30편 기획이 끝났을 터)



이 성향이 깨진 것은 직장을 다닌 뒤.

내가 세운 계획들이 온갖 기가 막힌 이유로

매번 (정말이지 매번!) 틀어지더라.



나는 디자인과 현장 감리를 겸하는 업이었는데

사소하게는 궂은 날씨 때문에,

어느 날은 업체에서 자재가 늦게 와서,

언제는 물류센터가 파업을 해서 ..

먼 나라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선박 경로가 막혀서 ..

(이건 진짜 어쩌란 말인가)



내가 이 전에 놓쳤던 모든 것을 바로잡아놓아도

수십 개의 대책을 세워놓고 주변에 신신당부를 해도

두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하는데도

기어코 다른 이유로 무너지는 나의 계획들을 보면서.



아, 세상이라는 게

내가 아무리 완벽하게 계획한다고 한들

내 멋대로, 내 생각대로만 굴러가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 뒤로, 쿨하게 계획을 접었다.



더 제대로 말하자면

이제 나는 무계획을 계획한다.



계획이 틀어지며 스트레스받는 것이 싫어서.

내가 아닌 이유로 틀어진 것을 수습하며

잘못을 스스로에게서 찾는 것도.

계획하는 데 쏟은 시간과 나의 노력이 아까워서.



완벽한 계획보다

수습 가능한 범위를 판단하고,

선택지를 여럿 열어둔다고 보면 된다.



여행을 갈 때는 항공, 숙박 정도만.

예매권? 투어권? 그런 것 없이 현장에서 부딪힌다.

매진이면? 기회가 아니었던 것, 다음에 또 오면 된다.

다른 날 하면 된다. 다른 거 하면 된다.



이거 해보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무리수인 도전들?

예전 같으면 죽 늘어진 계획 사이에

들어갈 틈도 없었겠지만 이제는 기꺼이 도전하고 본다.



음, 이렇게 살다 보니

기회비용 따지는 것이 많이 줄었다.

이거 할 바에 이게 낫겠는데? 하며

효율적인 선택만 추구하던 과거의 내가 많이 옅어졌다.



생각해 보면 계획을 한다는 것은

손해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 아닐까?

시간이든 자본이든 노력이든,

무언가 손해 보지 않고 최적의 경로를 찾고자 하는 것.

그렇다는 생각이 드네.



그런데 계획하던 삶을 돌이켜보면

머리 끙끙 싸맨다고 언제나 최상의 결과는 아니었고

손해 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계획이 틀어졌을 때 오는 감정적 손실이 가장 컸다.)



의외로 틀어진 계획에서,

하는 수없이 퉁명스럽게 했던 것들에서

에라 모르겠다! 저지르고 본 무모함 그 뒤 편에서

나는 새로운 영감을 받고, 바라던 길을 발견했다.



내가 조금 더 행복하게 느끼는 것은

예상 못한 지점에서 발견한 보물 같은 경험인가 보다.

그런 경험이 자꾸 내게 달라붙으니까

중독이 되어서 더욱 무계획을 계획 하나보다.

(그리고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고 ..

기대를 낮추면 작은 것에도 기꺼이 행복할 수 있다.)



사실 여전히 내 머리 깊은 곳에서는

무의식이 열심히 계획을 하곤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저항한다.



왜냐고요?

이젠 무계획이 더 짜릿 하니께요.



계획 = 완벽 = 기대 = 효율 = 손해안봄 = 기회비용

나는 이것들을 저항하는 삶으로 가는 중이다.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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