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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사원 Apr 03. 2016

[김 사원 #1] 기획팀원 세 명이 사표를 냈다

기획팀원 네 명 중 세 명이 사표를 냈다. 사표 행렬의 시작은 디자인팀 김 차장이었다. 이사들은 "디자인 그거 며칠 이면 되잖아?" 하며 디자인의 디귿도 모르는 듯한 소리를 자주 했고, '며칠이면 되는 디자인 그거' 업무는 점점 과도해졌다. 이런 일들로 몇 달 전부터 이사들과 김 차장의 설전이 몇 번 있었고, 결국 김 차장은 사표를 냈다. 뒤를 이어 개발팀 윤 과장이 사표를 냈다는 얘기가 들리더니 기획팀 송 차장과 이 과장도 사표를 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얼마 전 몇 달이나 말없이 늦어진 연봉 협상에서 연봉은 1%가 올랐다. 이때부터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은 커지기 시작했다. 이사들은 직원들의 크고 작은 의견들을 무심코 넘겨버리곤 했다. 그러다가도 사장의 지적이 있는 날은 직원들을 모아 놓고 '왜 능동적으로 일을 하지 않느냐'며 타박을 해 직원들이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얼마 전부터는 메신저 카카오톡에 사장이 포함된 '단톡방'을 만들어놓고 그곳에 직원들이 매일 업무보고를 하게 했다. 직원들은 월급도 적은데 이런 대우를 받고 이런 스트레스를 참으며 이 회사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획팀에 남은 사람은 홍 차장과 김 사원이었다. 둘은 사표 행렬에 대해 한두번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깊은 속마음까지 나누지는 않았다. 노란 오리 캐릭터를 닮은 40 대 사수와 입사한 지 1년도 안된 부사수는 각자의 방식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같은 팀 직원들이 급하게 퇴사를 결정하며, 홍 차장과 김 사원은 그들이 하던 업무들을 일단 떠맡게 되었다. '인력 충원을 어떻게 하겠다. 그동안 고생 좀 해달라' 같은 얘기는 없었다. 회사는 내년에도 연봉을 1% 올려줄 것 같았고, 이사들은 앞으로도 무식하게 일하고, 눈치 없는 사장은 주말마다 '행복한 사람들의 10가지 습관' 따위의 글을 단톡방에 올릴 것 같았다.


마침내 홍 차장도 결단을 내렸다. 우울한 오리 같은 표정을 짓고서 김 사원에게 자신의 사표 제출 소식을 전했다. 며칠 동안 김 사원은 홍 차장의 사표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틈이 없었다. 자리에 앉아 일하는 척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래도 홍 차장님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니까 급하게 퇴사하지는 않을 거라고, 후임을 뽑고 업무 인수인계를 할 때까지 한두 달은 더 다닐 거라고, 그때쯤이면 자신도 1년 차가 될 테니 회사를 옮길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동요하는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뿐이었다.


홍 차장이 사표를 낸 지 일주일쯤 됐던 어느 금요일 오후, 홍 차장은 커피나 한잔 하자며 김 사원을 불러냈다. 이 전에도 가끔 홍 차장은 배고프지 않느냐며 김 사원을 데리고 나갔었다. 보통은 커피나 간식거리를 사주고는 바로 사무실 자리로 돌아왔는데, 이 날은 커피를 사들고 회사 건물 1층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김 사원은 홍 차장이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했다.


"나 지난주에 사표 냈잖아"

"네, 하하. 어떻게 되셨어요?"


사표를 받은 이사들은 홍 차장을 붙잡았고, 홍 차장은 붙잡힌 모양이었다. 다음 주에 본부 조직 개편이 있을 거라고 했다. 기획팀에 새 직원이 출근하기로 했고, 기획 업무는 모르지만 어쩌다 보니 기획팀장이었던 김 팀장은 새 팀을 만들어 분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홍 차장이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김 사원은 홍 차장이 기획팀장을 맡게 되었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임감 있고 업무를 잘 아는 홍 차장이 팀장이 되어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홍 차장이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김 사원 자리는 이사실 바로 앞이라 이사실에서 하는 얘기들을 대충 엿들을 수 있었다. 퇴사를 굳게 결심하고 이직 준비까지 마친 직원이 이사와 면담을 할 때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가끔씩 직원의 겸연쩍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면 상대의 격양된 목소리와 함께 '노동부'라는 단어가 들리기도 했다. 홍 차장이 사표를 내고 이사와 면담할 때는 "우리 회사는 이러이러한 게 문제예요. 제가 다녔던 다른 회사에서는 이렇게 안 했어요."라고 말하는 약간 흥분한 홍 차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태도라기에는 애정 내지는 미련마저 느껴졌다.


한 주가 지나 조직 개편이 공지되었다. 새 직원들이 출근해 업무 인수인계를 했고, 퇴사가 결정됐던 직원들 중 윤 과장과 이 과장이 마지막으로 퇴사를 했다. 직원들이 줄줄이 그만두는 와중에도 진행 중이던 사업 하나는 마무리가 됐다. 기존 직원이 질려서 떠난 버린 자리에는 어딘가를 떠나왔을 사람들이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홍 팀장을 포함한 기획팀 세 명은 업무 현황과 계획에 대해 간단히 회의를 했고 개편된 조직에 맞게 자리 배치도 바꿨다. 김 사원은 업무 정리와 자리 이동까지 마치고 나니 '뭐 그렇게 사표까지 낼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 사원은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새로 온 기획팀원 이 차장은 자기보다 몇 살 어린 홍 팀장과 갈등을 빚을지도 모른다고. 내년 연봉은 1% 인상은커녕 동결될지도 모른다고. 이사들은 계속해서 직원들의 혈압을 오르게 하고, 권위적인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장은 권위적인 본인을 욕하는 직원들의 속을 영원히 모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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