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어떤 이야기가 맘에 듭니까”
"어떤 이야기가 맘에 듭니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 중년의 파이는 그렇게 물었다. 나는 주방장, 선원, 엄마가 나오는 '현실적으로 그럴듯한' 이야기가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파이가 조금이라도 덜 고통받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차라리 리처드 파커가 나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으면 싶었다.
나아가서는 리처드 파커 이야기마저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화라고 여겼다. 리처드 파커는 파이의 생존 본능을 비유한 것이고, 자신의 깊숙한 내면을 직면한 파이는 충격과 불안감을 느낀 것이리라. 그러고 나니 나에게 저런 끔찍한 일이 실제로 닥칠 일은 없겠구나 싶어 다행스러웠다. 우화에서 교훈을 얻었으니 앞으로 있을 삶의 고통에 대비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두려운 마음을 달랬다.
리안 감독은 이 영화를 '이야기의 환각성, 입증할 수 없는 것을 믿게 하는 힘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다.* 바로 그랬다. 나는 파이가 가족을 잃고 고통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파이를 믿기 어려웠기에, (감독이 의도했듯) 이야기를 이용해 환각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환각 속에서 비로소 파이에게 공감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기까지 했다.
당신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합니까
파이의 질문을 '당신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합니까'로 바꿔본다. 파이를 찾아온 캐나다 작가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필요했을 것이고, 일본 보험사 직원에게는 회사에 보고할 만한 '바보 같지 않은 이야기'가 필요했을 것이다.(그렇지만 결국 보험 보고서에는 그들이 바보 같다고 생각한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위로와 편안함을 주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가족, 동물원, 인도, 아난디…. 파이가 이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과 나는 각자의 사연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 중 어느 하나도 배가 왜 침몰했는지, 무엇이 사실인지 증명하지 못한다. 다만 내 이야기를 마쳤을 때, 나는 파이를 믿게 되었다.
* 출처 : '스토리텔링 기법에도 변화를', <씨네 21>, 2013.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