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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셜제너럴리스트 Sep 04. 2019

'운이 좋았던 것이다' VS '내가 노력한 것이다'

우리는 공정의 기준을 들이대기에는 너무 모호한 세상에 살아간다.


당신이 회사 사장이라고 가정해보자. 어쩌다가 누군가의 지인을 통해 청년을 알게 되었다. 만나보니 일도 잘하고 참 마음에 드는 청년이었다. 때마침 회사에 TO가 생겨 그 친구에게 채용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그 청년은 그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던 다른 청년들의 기회를 뺏은 불공정한 일에 참여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살아가면서 단 한 번의 수혜와 특혜를 받았던 순간들이 없었던 사람들이 있을까.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위 청년도 그 '누군가의 지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 사장을 만나는 운 좋은 상황, 즉 수혜를 입었고 취업 제안을 받는 특혜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청년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살다보니 거기에 따른 공정한 댓가를 받은 것이다.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공정의 경계가 아주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칼같이 잘라서 나는 공정하고 너는 불공정했다고 이야기하기가 정말 힘든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저 촛불을 들고 있는 명문대생들도 그런 세상의 모호함을 인지하고 있을까? 저들이 생각하는 공정한 사회는 도대체 무엇일까? 진정으로 분노해야 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사실 나는 무엇이 공정한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나에게 청년과 같은 제안이 온다면 '그것은 다른 청년들의 기회를 뺏을 수 있는 불공정한 것이기 때문에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 얽혀살고 있고 공정이라는 기준을 뛰어넘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운 좋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모든 것을 완벽한 잣대로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모호한 기준의 세상에 살아간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사람과 상황을 판단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공정이냐 불공정이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기준은 그 사람이 자신이 받은 특혜를 '나는 운이 좋았던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세상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려고 노력하느냐, 아니면 '내가 온전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올라왔던 사다리를 차는데 일조하느냐라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한 교수님이 말씀하신 말이 마음에 남는다.


'누군가는 더 애절하게 원했던 사람의 기회를 사실은 버리도록 만든 거였기 때문에 그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 된다. 그만큼 낮은 사람을 배려하고 사회가 주는 어떤 혜택을 이번 과정을 통해서 느끼면서 더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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