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말경에 피카소는 일련의 소묘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2개월이 지났을 때 작품의 수는 180점에 이르렀다. 굉장히 열심히 그려진 그 그림들은 자전적이다. … 사람들은 모두 그것들이 지닌 의미가 워낙 복합적이고 신비스럽고 개인적이라 그것을 말로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건방진 일이라고 짐짓 꾸며댔다. 한 번 더, 오, 피카소! 하고 미사여구를 나열하면 충분했다. …
성공은 동시에 갈망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살아남고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수단을 약속해준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썩어가는 길일 위험이 있다. 가장 빈번하게 들려오는 비판은 이렇다. 즉, 아무개는 성공한 후로 똑 같은 일만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괴로움으로 겪었던 그 성공이 어떻게 그에게 손해를 끼쳤는가를 매우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피카소가 자신의 성실성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타락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크게 잘못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그는 자신의 본래의 자아에 완고할 정도로 충실했다. 끼쳐진 손해는 그가 발전을 저해당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그가 현대적 현실과의 접촉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사회 속으로 동화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실패한다는 것이 배척당하고 있음을 뜻하듯이 말이다. 피카소는 유럽의 부르주아 사회 속으로 동화되었다. 그리고 이 사회는 지금 본질적으로 비현실적이다.
존 버거,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미진사, 1984(초판)
제 2차 세계 대전 직후 피카소는 남 프랑스에 있으면서 주로 석판화와 도기의 제작에 열중하였다. 어느 것이나 당시 새로이 손을 댄 분야였으나 이 분야에서도 그는 현대미술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 평가 받은 그대로 발견하고 학습을 연구하고, 개척하고, 창조하는 왕성한 의욕을 불태워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또 1950년대부터는 걸쳐서는 벨라스케스, 들라크루아, 크라나하, 마네, 다비드 등의 명작과 대결하여 이것을 자기의 양식화한 독특한 모작에서 새로운 진로를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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