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판차탄트라』에 실린 이야기이다. 한 남자가 시장에서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사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근처 숲길을 지날 때 세 명의 동네 건달이 그 염소를 빼앗기로 모의했다. 나무 뒤에서 기다리던 건달 한 명이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시오. 그런데 왜 개를 어깨에 메고 가시오?” 남자가 말했다. “이건 개가 아니고 염소요. 보면 모르오?” 건달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개를 염소라고 속아서 샀군.” 다른 나무 밑에서 기다리던 두 번째 건달도 남자에게 같은 말을 했다. “안녕하시오. 예쁜 강아지를 어깨에 메고 가시는군요.” 남자가 말했다. “이건 개가 아니고 염소란 말이오.” 두 번째 건달도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어리석게도 개를 염소라고 속아서 산 게 틀림없군.” 숲 끄트머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번째 건달이 말했다. “어디서 강아지를 구했길래 개를 어깨에 메고 가시오?” 계속 똑같은 말을 듣자 남자의 믿음이 크게 흔들렸다. 결국 그는 자신이 어깨에 메고 있는 염소를 개라 여기고 길에 버리고 달아났다. 그리하여 염소는 건달들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자신의 판단력을 믿지 않고 남의 조언에 흔들려 자신이 가진 것을 잃는 사람에 대한 우화이다.
힌디어에 ‘킬레가 또 데켕게’라는 격언이 있다. ‘꽃이 피면 알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지금은 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고 설명할 길이 없어도 언젠가 내가 꽃을 피우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자신이 통과하는 계절에 대해 굳이 타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증명하면 된다. 시간이 흘러 결실을 맺으면 사람들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므로.
어떤 특별한 장소에서, 혹은 어떤 성스러운 도시에서 생을 마쳐야만 카르마를 정화하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덜어 주고 힘들어하는 한 영혼을 달래 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특별한 장소이고 구원의 장소일 것이다.
"특정한 주제에 알맞는 예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이야기나 일화를 발견하면 그것을 마음속에 잘 보관해 둔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것에 어울리는 주제가 나타난다." 우리가 삶에서 발견하는 의미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의미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작가는 어느 특정한 곳에 있는 소재가 아니라 모든 것과 모든 만남 속에서 글의 주제를 발견하는 사람이듯이. 당신 또한 완벽하게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과녁에 적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 선물을 기다리는 대신 삶이 주는 모든 것에서 선물을 발견하고 긍정의 동그라미를 치는 것, 그것이 자신을 완전한 자아로 만들어 나가는 길이다. 매 순간 자기만의 과녁을 그려 나가는 어린 소년 처럼.
어떤 것을 바라볼 때는 다만 바라보라. 어떤 것을 들을 때는 다만 들으라. 어떤 것을 감각할 때는 다만 감각하고, 인식할 때는 다만 인식하라. 그것들에 나의 마음을 개입시키지 않으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마음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고, 자유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볼 때는 오직 바라봄만이 있어야 한다. 들을 때는 오직 들음만이 있어야 한다. 감각할 때는 오직 감각만이 있어야 하고, 인식할 때는 오직 인식함만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변덕스럽고 일관되기 어렵다. 주어진 환경에서도 처음의 판단과 나중의 생각이 다르다. 옳은 길이고 올바른 계획이라면 즉시 따라야 하고 행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음의 다른 요인과 의심들이 고귀한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전에.
“물론 나도 풀이 초록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와 논쟁을 벌였기 때문에 너를 벌한 것이다. 논쟁이 논쟁다워지려면 적어도 자신보다 지식과 지혜가 높은 자와 토론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와 무의미하게 논쟁함으로써 너는 소중한 시간과 기운을 낭비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것이 네가 벌을 받는 진짜 이유이다.”
내가 날지 않으면 어느 날 삶이 강제로라도 날게 할 것이다. 내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려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