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셜제너럴리스트 Oct 15. 2021

벤투는 좋은 감독일까?

니시베 겐지, 세계 축구 명장의 전술

한국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 최종예선에 가면 항상 벌어지는 패턴이 있다.   


최종예선에서 약팀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000 쇼크'라는 말이 나온다.

감독이 월드컵 진출을 앞두고 경질되거나 그만둔다.

새로온 감독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채 월드컵을 간신히 치르고 예선 탈락한다.

대표팀이 공항에 도착하면 엿이 날아다닌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보면서 철학이 유지되고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를 내는 과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 결과보다 과정에 충실한 축구를 보고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현재 파올로 벤투 감독이 최장기간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팀을 빌딩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벤투 감독 앞에 또 다시 '경질'이라는 단어가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가 주어진 현실에 비해 너무 높은 기준을 대표팀에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표팀에게 주어져 있는 현실과 환경에 대해 실제적인 정보와 맥락을 모른채 감독과 선수를 평가하고 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평가당할 수 밖에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실체적인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정보를 최대한 모아보고 맥락을 고려해서 조합하고 평가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히려 감독의 선택의 과정을 이해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감독이 가진 철학에서 어떤 전술적 결정들이 나오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이런 저런 책을 찾다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 책을 골랐다.


내가 고른 '세계 축구 명장의 전술'은 전술이나 코칭 스타일에 따라 감독의 범주를 나누고 감독이 가진 철학으로부터 어떤 대표적인 전술 스타일이 나타나는지를 감독별로 간단하게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벤투 감독이 가진 철학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고 싶었다.



축구에는 정답이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부분은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축구도 정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지고 싶어 안달난 감독은 세상에 절대 없다. 모든 감독이 자신이 맡은 팀을 잘 지도해서 좋은 결과를 내고 커리어를 발전시키고 싶어할 것이다. 모든 축구 감독이 '어떻게 주어진 자원을 활용하여 이길 것인가'를 생각한다. 다만 그 철학과 방법론이 감독마다 다른 것이다.


"필승 전법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결국 감독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따라서 전술이 결정된다. 축구 감독이란 이겨야 하는 직업이다. '어떻게 이길 것인가'에 대한 감독의 판단이 바로 축구 철학이다." p.3


요한 크루이프의 '토털사커'를 이어받았다고 평가받는 과르디올라는 주도권을 놓지 않아야 이긴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좌우 풀백을 미드필더로 올리는 식으로 전방과 중원에서 공을 뺏기지 않고 경기를 지배하는 능동적인 축구를 추구한다.


반면 이기기 위해서는 수비를 안정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감독도 있다. 수비 숫자를 최대한 가져가고 딱 한번의 역습으로 득점을 성공시키는 전술을 추구한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이끄는 시메오네가 그런 철학을 추구하는 감독이다.


여기에 전술적인 역량보다는 선수를 관리하는데 능한 감독도 있다. AS 모나코를 이끌었던 자르딤의 경우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AS 모나코의 현실에 맞춰 팀 전반의 시스템을 일관되게 맞추고 선수들이 빠르게 시스템에 녹아들 수 있는 효율성 높은 축구를 구사했다. 복잡한 전술을 구사하는 것 보다 기본적인 전술을 활용하되 선수 관리에 능한 타입으로 좋은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퍼거슨 감독도 그런 스타일에 속했던 것 같다.


감독마다 승리하기 위한 방법론이 정반대인 경우가 있다. 비엘사 감독은 수백개의 패턴을 만들고 선수들에게 그 패턴을 주입하고 운동장에서 그대로 실현하기를 요구한다. 반면, 젊은 감독인 니겔스만은 선수들이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나름 좋은 성과를 거둔 감독들의 축구 철학에서 공통된 특징은 별로 없었다. 그 어느 것도 정답이 없으며 각자가 생각하는 축구에 대한 철학과 방법론, 그리고 주어진 상황에 대응해왔던 과정만이 남을 뿐이었다.



벤투는 어떤 감독인가?

이렇게 많은 감독들의 철학을 통해 벤투 감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의 축구 철학은 좌우 풀백의 공격 가담을 중요시 하고 수비라인을 꽤 많이 올린다는 점에서 토털사커에 가까워 보인다. 거기에 정우영과 같이 안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를 기본으로 배치하고 활동량이 좋은 미드필더와 기술이 좋은 미드필더로 밸런스를 맞춘다는 점에서는 밸런스를 중시하는 철학이 엿보이기도 한다.(유로 2016년에서 그가 맡은 포르투갈도 기본적으로 비슷한 포메이션과 전술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책에서 말한 감독의 분류 어느 한 부분에 벤투 감독을 놓기는 애매했다.


그래도 책을 통해 다양한 감독들의 철학을 접하면서 그의 스타일과 축구 철학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전술적인 탁월함보다는 코칭을 함께하는 팀의 리더로서 선수단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감독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안정적이지만 경기의 주도권을 놓지 않는 축구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같은 국가의 감독인 무리뉴와 같이 밸런스를 고려하지만 수동적으로 경기에 임하기 보다는 주도권을 가져가야 이길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안정적으로 주도하는 축구. 이것을 벤투의 철학으로 생각해보면 그의 선택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전방 공격수를 항상 1명으로 고집하기 때문에 전방 공격수의 존재감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투톱을 주장한다. 하지만 공격수를 2명으로 늘렸을 경우 중원의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경기의 주도권을 내줄 수 있다. 그렇기  전방에 공격수를 늘리기 보다 미드필드에 많은 선수를 배치해서 경기를 안정적으로 가져가면서 골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선수 선발 폭이 넓지 않다는 부분을 지적한다. 그러나 대표팀은 클럽팀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선수를 뽑아서 실험을 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1년에 몇번 경기를 치루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플랜 A마저 제대로 세우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기에 확실하게 자신의 축구 철학을 이해하고 있는 선수들을 선발해서 운영하는 것이 안정적이기 때문에 선수 선발과 선발 라인업의 변화를 크게 주고 싶어하지 않는 것같다.(물론 그의 선발 라인업은 어느 정도 고정이 되어 있지만 선수 선발에 있어서는 이동준, 이동경과 같이 올림픽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선수들을 선발하는 등의 변화는 가져가는 편이다.)


손흥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손흥민 위주의 팀 편성과 전술을 짰을 경우 상대편 입장에서는 손흥민만 제대로 틀어막으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팀 전체의 운영이 한 사람에게 의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욱 안정적인 경기를 하는데 중요하다고 판단한다면 그의 손흥민 활용법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심지어 대표팀에는 손흥민의 플레이를 살려줄 만한 월드 클래스급 선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손흥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최근 이란전에서 벤투는 손흥민을 주 포지션인 왼쪽 날개에 기용했고 손흥민은 그날 골을 기록했다.)



벤투는 좋은 감독인가?

그래서 그가 좋은 감독인지는 판단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가 우리나라 축구가 지향하고 있는 목표를 향해 잘 나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축구협회에서 국가대표팀의 경기력 향상을 담당하고 있는 김판곤 위원장은 지난 감독 선임과 관련된 인터뷰에서 우리 축구의 지향점을 '능동적이고 지배하는 축구'라고 표현했다.


"홍콩 대표팀 감독에서 대한축구협회 위원장으로 옮겨오자마자 한국축구의 철학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능동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경기를 지배하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한국축구의 체질을 바꾸고 이를 실천할 감독을 선임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저의 개인적인 철학이 아니라 세계 축구의 보편적 흐름이다. 전력이 약한 팀은 수동적인 플레이에 기반해 상대의 실수에 의해 득점하는, 즉 경기를 지배하지는 못해도 승리를 가져가려는 전략을 쓴다. 아시아 최고 수준이자 세계 무대 16강 이상을 다투는 한국축구 수준이라면 이제는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플레이로 경기를 지배하는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개인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단기간에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시아 무대에서는 능동적인 플레이를 하다가 세계 무대에서는 수동적인 플레이로 전환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http://www.g-enews.com/ko-kr/breaking/sokview.php?ud=202107261526276045620e02e8e3_1)


'경기를 지배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대의 실수에 의해 득점하는 축구', 우리가 '카잔의 기적'이라고 불렀던 독일전이 그랬다. 결과는 승리였지만 우리가 잘해서라기 보다는 독일이 못한 부분도 매우 컸다.  지난 월드컵을 거치면서 선수들도 능동적으로 경기를 지배하는 축구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크다고 느껴졌다. 나는 벤투 감독이 추구하는 후방 빌드업이나 풀백들의 적극적인 공격 움직임 등은 능동적인 축구를 하려는 현재 한국축구의 지향점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축구 그 자체를 즐기는 문화로

과거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축구는 오랜 시간 동안 '아싸' 국가의 한을 풀기 위한 수단이었다. 선진국에 뒤쳐진 현실을 잊고자 했던 대표적인 '국뽕' 수단이 축구였던 것이다. 그만큼 엘리트 스포츠에서 가져오는 결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축구에 많은 사람들이 몰입했고, 결과에 집착하곤 했다. 수많은 감독의 중도 경질은 뒤쳐진 현실을 '국뽕'으로 대체해보고자 했던 사람들의 무리한 욕심이 빚은 결과들이었다.(심지어 독일은 2018년 월드컵을 대차게 말아먹었던 뢰프 감독을 경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도 나름 선진국이 되었다. 박세리, 박찬호, 박지성에 목을 맬 수 밖에 없었던 과거와 지금의 우리 상황은 너무나 달라졌다. 경제 수준이 올라간 만큼 많은 한국인들이 문화, 스포츠 다양한 분야에서 주류가 되어 활약하고 있다. 억지스러운 '국뽕'이 필요한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궂이 국대 축구에 목을 매지 않아도 우리가 나름 괜찮은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이제는 문화, 스포츠 그 자체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되었고, 앞으로는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축구도 너무 결과에 집착하기 보다는 과정이 어떻게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벤투 감독이 월드컵에 진출을 해서 우리가 목표로 하는 8강에 올라가든, 예선 탈락을 하든 크게 관심이 없다. 다만 벤투 감독이 한국 축구가 목표로 하는 '능동적인 축구'를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 나가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의 중간 결과가 아무리 좋지 않게 나타나더라도 그를 경질해야 한다고 말할 생각이 없다. 현재까지는 그 지향점을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게 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벤투 감독의 전술적인 판단의 미스보다 일부 사람들의 선수들을 향한 과도한 비난이 더 한국축구가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축구도 심리적 안정이 중요한 만큼 선수들이 지지 받는 만큼 더 좋은 플레이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월드컵에서 너무나 많은 비난이 쏟아져 선수들이 긴장하고 위축된 모습들이 보여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너무 결과에 집착하기 보다 감독과 선수들이 지향하는 축구, 보여주고 싶은 축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수많은 축구 철학이 공존하는 가운데, 정답과 오답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축구의 깊고 오묘한 재미일지도 모른다." p.191
매거진의 이전글 허위 정보에 공동체는 어떻게 파괴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