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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셜제너럴리스트 Dec 29. 2021

설강화, 표현의 자유만큼 중요한 것

존 스토 '이야기의 탄생'

설강화는 왜 그리 논란이 되었을까?

최근에 읽은 존 스토의 '이야기의 탄생'의 독후감을 통해 그 답을 생각해 보려 한다.



이야기의 핵심 - 인물, 통제이론, 극적질문

이 책은 이야기 서술에 대한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인물 중심의 이야기 작법을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이야기의 핵심인 인물, 인물 심리의 중심을 이루는 결함있는 통제이론, 이야기의 주제를 이루는 극적 질문, 인물을 변화하게 만드는 플롯에 대해 뇌과학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야기 속 인물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집,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과거의 상처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며 이야기속의 인물은 모두 결함이 있는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인물은 자신만의 통제 이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인과관계를 해석한다. 인물이 생각하는 세상은 인물이 옳다고 생각하는 통제 이론을 바탕으로 돌아가고 있다.


플롯은 인물과 대립하며 인물이 옳다고 생각했던 신념, 통제이론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상황의 변화는 잠재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인물은 다시 세상을 통제하고 있다는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통제이론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의 핵심이 나타나는데, 즉 이야기는 인물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극적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을 하는 과정에 관한 것으로 정의된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이다. 우선 발화점에서 이 질문이 떠오른다. 첫 번째 변화가 발생할 때 주인공은 과잉 반응을 보이거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자세를 바로 하고 새삼 집중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다 주인공이 플롯에서 난관에 봉착하거나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 이 질문이 다시 나온다.”

“이야기는 결국 결함 있는 자아가 치유의 기회를 얻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행복한 결말인지 아닌지는 인물이 그 기회를 받아들일지 말지에 달려 있다.”



이야기의 기원

존 스토에 따르면 이야기는 부족의 생존을 위해 활용되던 소문으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부족의 이야기는 행동규범이 되어 집단성을 강화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외부인을 타자화시킨다.


“어떻게 행동하고 사람들과 연결되며, 어떻게 지위를 얻을지에 관한 집단의 이야기가 우리의 정체성을 이룬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런 원시적인 인식이 있다. 우리는 부족의 이야기로 사고한다. 이것이 우리의 원죄다. 우리 부족의 지위가 다른 부족에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마다 이런 고약한 신경망이 발화하고, 그 순간 우리는 잠재의식 차원에서 다시 선사시대의 숲이나 초원으로 돌아가며 스토리텔링 뇌는 전투 태세에 돌입한다. 반대편 집단에는 오로지 이기적인 동기만 부여한다. 독기 품은 변호사가 되어 상대의 가장 센 주장만 듣고 상대가 하려는 말을 곡해하거나 생략한다. 상대의 가장 수준 낮은 구성원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빌미로 그들 모두를 붓으로 뭉개듯 동일시해버리고 일개 개인만 보고 다른 모두의 깊이와 다양성은 지워버린다. 한 개인을 형체만 그려둔 다음 부족을 그런 형체의 무리로 만든다. 자기 부족 안에서 아낌없이 나눠주던 공감과 인류애와 인내심 있는 이해를 이런 형체에는 나눠주지 않는다. 그사이 우리는 마치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도덕적인 주인공이 된 것처럼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유혹적인 이유는 우리의 영웅 만들기 뇌가 우리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원시 부족적인 충동을 정당화시키고 우리가 혐오감에 사로잡힐 때도 우리 자신이 신성하다고 믿게 만든다.”


집단이 가진 서사는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개인의 신념을 구성한다. 개인은 집단을 통해 형성된 통제이론을 따라 행동할 때 도덕적 우월감을 획득할 수 있으며, 통제이론을 구축하는 핵심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집단과 개인이 통제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


“우리는 통제력을 잃으면 적극적이고 영웅적인 인물이라는 자아 감각을 잃고 결국 불안하고 우울하고 심각한 상태로 치닫는다. 뇌는 이런 상태를 피하기 위해 영웅적인 우리 자신에 관한 설득력 있고 교묘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의 뇌는 모든 것들을 지각할 수 없으며 우리는 뇌가 볼 수 있는만큼만 보고 믿을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이야기 속 인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결함있는 통제이론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서로가 옳다는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집단의 이야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이야기는 통제 상태, 즉 생존과 목표 달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배척해야 하는 대상이 되며, 공격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본능적인 인간의 방어기제인 것이다.


그러면 서로 다른 서사를 가진 집단과 집단, 인간과 인간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역설적으로 그것 또한 이야기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인간은 자신의 부족이 선호하는, 자신의 배경과 비슷한 이야기를 선호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집단과 개인에게 소구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부족의 선전 매체이자 부족에서 내세우는 프로파간다에 대한 치유책이다. (...) 이야기는 이렇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유혹적인 집단 혐오에 대한 치유책으로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등장 인물에 대한 마음 모형을 만들고 인물과 공감하는 과정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생존하기 위해서는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야기의 존재가 필수적이며,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결함있는 신념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정해나갈 수 있게 된다.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우리가 얼마나 틀렸는지 우리 자신은 전혀 모른다는데 있다. 우리의 신경모형에서 취약한 부분을 발견하는 것은 그 부분의 외침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인데, 우리가 비이성적으로 감성적이고 방어적일 때는 대개 우리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부분을 넘겨주는 때이다. 이 지점에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가장 왜곡되고 예민해진다. 이런 결함을 마주하고 고쳐나가는 일은 평생의 싸움이 된다. 이야기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이기는 것이 영웅이 되는 길이다.”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표현의 자유만큼 중요한 것은

다시 설강화로 돌아와보자. 아직 5회까지 방영되지 않았지만 설강화는 시놉시스와 인물 설명이 나온 직후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심지어 방송 이후 설강화의 스태프라 밝힌 사람은 인터넷 게시판에 '민주화운동을 비화한 드라마가 아니며, 설령 민주화운동을 비하하면 어떤가?'라는 주장을 했다. 사실 틀린말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고 어떤 생각도 존중받아야 할 자유가 있다. 문제는 설강화는 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 영화가 아니라 다수의 대중을 만족시켜야 하는 드라마라는 것이다.


설강화에서 주인공인 임수호는 민주화운동을 위장한 간첩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기에 한국에서 공작을 펼치던 남파간첩이었다. 안기부의 은창수나 이강무도 충분히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부수적인 장치들을 뜯어내고 보면 설강화는 남파간첩과 대학생의 로맨스이며 그 배경이 민주화운동이 가열차게 일어나던 독재정권 시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설강화는 연기력 논란이 일어난 여주인공을 빼고는 큰 문제가 없어보이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사실 설강화를 보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훨씬 더 심각한 드라마가 올해 방영되었다. jtbc에서 방영되었던(공교롭게도 또 jtbc이다.) '언더커버'에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던 김태열(공교롭게도 전태열과 이름이 같다.)은 민주화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으나 독재정권과 야합하려던 인물로 묘사된다. 전태열과 이름도 같고 전대협 의장으로 나오는 김태열이 독재정권과 야합하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설강화와 같은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의 예를 참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롤리타는 주인공 험버트와 열두살 소녀의 성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55년에 쓰여진 작품인데 그 당시 집단이 가진 도덕적 신념에 비춰볼 때 이 소설 뿐만 아니라 작가인 나보코프 또한 살아남기가 어려웠을 것 같지만 작가도 소설도 모두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탄생'에서는 그 비밀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나보코프는 독자들이 처음 일곱 페이지를 읽고 정화의 불 속으로 책을 집어 던지지 않도록 아주 긴 지면을 할애해서 무의식중에 우리의 부족적 정서를 조작해야 했다. 그는 어느 학자의 학술적인 글을 서문 형식으로 끼워 넣어서 본 이야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험버트가 죽었다고 밝힌다. 곧이어 그가 죽기 전에는 법적으로 구금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알린다. 이 서문은 독자가 도덕적으로 분개하기 전에 김을 뺀다. (..) 주인공이 무슨 짓을 저질렀든 그는 이미 부족 차원에서 응분의 벌을 받은 것이다. 이제 독자는 마음을 놓을 수 있으며 험버트를 벌하고 싶은 갈망은 가라 앉는다."


나는 나보코프가 롤리타를 쓰면서 이 소설을 읽을 대중 집단의 집단적인 방어기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했다고 본다.(물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지만..) 대중들이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표현의 적정 선과 극적 장치들을 충분히 신경썼던 것이다.


언더커버에서 민주화운동의 핵심이자 정권과 야합하던 김태열은 일단 죽은 상태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또한 주인공인 최연수는 그의 비밀을 알게된 다음 충격을 받지만 마음속으로 그를 단죄하고 그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드라마의 핵심소재 자체가 민주화운동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대중의 정서에 부합하는 장치를 통해 집단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도록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논란이 될만한 인물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고 그를 극복하려는 모습을 표현했기 때문에 언더커버는 대박이 나지는 않았지만 큰 논란이 일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논란이 될만한 소재를 드라마의 장치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화운동이라는 서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확신을 주는 이야기로 존재한다. 여전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독재 정권의 탄압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아픔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서사 자체가 가진 도덕적 신념이 상당하고 방어기제 또한 강력하게 작동된다. 사실 이런 서사를 건드릴 거라면 이런 반응은 각오했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인물을 만들어 나가는데 있어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서사가 공격받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들이 있어야 했다. 예를 들어 간첩인 임수호가 민주화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내용을 추가해서 민주화운동과 주인공을 서사적으로 완전히 분리시켰다면 어땠을까.(결국 디테일한 부분에서도 드라마는 논란을 자초했다.)


시놉시스와 인물 소개가 공개되었을 때부터 드라마 방영까지 오랜 시간이 주어졌고 그것을 수정할 기회도 있었을 텐데 그런 노력없이 우리는 억울하다고만 주장하는 것은 스토리텔러로서의 무능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우리가 얼마나 이 드라마를 노력해서 만들었는데라고 말하며 칭얼거리는게 프로의 자세는 아닐 것이다.) 예술 영화도 아니고 특정 다수를 고객으로 하는 대중문화라면 그만큼 대중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념에 대해 공격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인물과 플롯 구성에 신경을 써야 했다. 대중문화 콘텐츠는 대중을 설득하기 보다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설강화는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의 신념을 공격하는 듯한 스탠스에 더해 공감대를 얻으려는 노력까지 부족했던 결과 보기에 불편한 콘텐츠로 전락해버렸다. 대중문화 콘텐츠가 보기 불편한 콘텐츠가 되었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실제 드라마의 내용이 어찌되었든 간에 설강화에는 이미 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훼와 독재정권에 대한 옹호라는 이미지가 씌워져 버렸다. 집단을 불편하게 만드는 대중문화 콘텐츠는 절대 사랑을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언더커버보다도 못한 시청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각자 뇌가 보여주는 환각을 진실로 믿고 살아간다.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집단과 집단이 연결 될 수 있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환각을 딛고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된다. 결과적으로 설강화의 문제는 바로 본인들의 콘텐츠를 소비해 줄 대중들에게 공감을 일으킬만한 스토리상의 배려가 부족했고 거기에 더해 심리적 방어기제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충분히 존중한다. 하지만 나는 설강화의 제작진들이 콘텐츠를 만들고 팔아야 하는 장사꾼들의 기본 자세가 한참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밥 먹고 콘텐츠만 고민하고 만들어내는 프로들이 대중과의 공감대에 대해 고민이 부족했다는 것은 프로답지 못한 자세이다. 설강화는 대중문화 콘텐츠로서 대중을 소홀하게 생각한 댓가를 치룰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논란이 있을 법한 소재를 다룰 때는 대중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줄타기를 교묘하게 잘 해야 본전이라도 건질 수 있다.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은 표현의 자유만큼 중요한 대중문화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사람들의 대중에 대한 기본 예의이다. 롤리타, 언더커버에는 있었고 설강화에는 없었던 것은 바로 대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PS. 사실 존 스토는 집단의 경계 안에서만 머무르는 사고를 책을 통해 비판한다. 나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도 그 자체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전제 조건으로 존 스토는 작가가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설강화의 문제는 집단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진실에 대한 존중을 소홀히 한 채로 위험한 줄타기를 했다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작가가 이런 방법(해석 - 다른 성별, 인종,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시도할 때는 높은 수준으로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나는 이들이 평화와 정의와 이해를 해치는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에게 분노하는 사람들이 더 분열을 조장할까 우려된다. 똑똑한 사람은 언제든 자신의 신념을 옹호하기 위해 설득력 있는 도덕적 주장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집단의 경계 안에만 머물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침팬지 수준의 외국인 혐오증에 불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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