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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셜제너럴리스트 Mar 08. 2022

회사를 10년 다녀보니(3)

나를 위해 일한다는 것의 역설

내가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외국인 환자의 진료비용을 청구하는 일인데, 그 중 중동 국가와 관련된 청구서를 작성해서 기관에 제출하고 청구된 금액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처음 팀에 발령받고 인수인계를 받아보니 막막했다. 레터, 영수증, 세부내역서 등등 제출해야 하는 양식을 따로따로 작성해야 하다보니 시간도 오래걸리고, 정확도도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름이나 환자번호같은 기본 정보라도 한번에 모든 양식에 적용되게 하면 작성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인수인계를 해주던 후배에게 살짝 개선을 해보면 어떨지 물었더니 이렇게 얘기했다. 


'선배님 어차피 조만간 온라인 청구 시스템 개발 될테니 궂이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그대로 가시죠'


일단 업무를 잘 모르니 인수인계 받은 그대로 청구서를 작성해봤다.(청구서 하나 쓰는데 매뉴얼이 얼마나 복잡하고 양이 많았는지 모른다.) 당시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에 갓 태어난 서우까지 있어서 야근할 수 없다는 각오로 미친듯이 일을 했는데(지금 차장이 되신 당시 과장님이 나를 불러도 대답도 없을 정도로 미친 집중력을 보였다고 하실 정도로) 화장실까지 참아가면서 일을 해보긴 처음이었다. 아무리 그렇게 일을 해도 청구서를 작성하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정확도도 떨어지니 다 작성한 청구서를 갈아 엎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서 잘 하지도 못하는 엑셀을 연구해보기 시작했다. 레터, 영수증, 세부내역서 등을 한 엑셀에 통합하고 기본 정보를 입력하면 모든 양식에 다 적용되도록 했다. 전산에서 일일히 대조하며 수기로 입력했던 방식에서 전산에서 그대로 긁어와 붙이면 영수증에 금액이 모두 적용되도록 개선했고, 지금은 아예 처방코드와 연동해서 영수증이 자동 작성되도록 만들었다. 레터, 영수증, 세부내역서 등을 따로 작성하던 방식에서 한번 전산에서 내역을 긁어 붙이면 레터, 영수증, 세부내역서가 모두 한번에 완성되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개선을 하고나니 10억 짜리 청구서도 하루가 아니라 반나절도 걸리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아낀 시간으로 다른 일들도 여유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이타적이지 않다. 특히 요즘 MZ세대는 자신의 발전과 의미가 없으면 일에 몰입하기 어렵다고 한다. 10년을 직장인으로 살아보니 조직을 위해서 일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야근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더 여유롭게 일하기 위해서 조금만 노력하면 역설적으로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결국 일도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돈을 벌어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거기에 기왕이면 내가 덜 고생하고 편하게 일할 수 있을까를 생산성 측면으로 고민해보기 시작하면 나를 위해 개선하는 것들이 조직에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내가 편해지기 위해 노력한 건데 역설적으로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편해지기 위해 일을 개선하려면 무엇이 중요할까?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영역에서 생산성을 저해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만 잘 정의해보면 된다. 해결하기 위한 전문적인 지식은 물어보고 공부해보고 빌려오면 된다. 일을 잘하기 위해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을 배우려고 노력하기 전에 내가 하는 일에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어서 불만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게 중요한 것 같다.


거대 담론이 점점 사라지는 걸 지켜보면서 일터에서도 거룩한 소명이나 사명과 같은 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최소한 나를 위해 일을 해보면 어떨까?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일을 더 생산적으로 하다보면 남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보니 내가 마치 일에 대한 철학계에서 애덤 스미스가 된 것 같다...ㅎㅎㅎ


PS : 아 그 후배가 말한 온라인 청구 시스템.. 아직도 개발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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