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그는 내가 어린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좋은 할아버지 정도로만 기억에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 드라마 '삼김시대'를 보면서 아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는 정도가 그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김대중은 거대한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위대한 삶을 살았던 다시 만나기 힘든 시대의 거인이었다.
'김대중과 현대사'. 이 책은 김대중의 철학과 비전, 정치인으로서의 업적 등을 정리한 상당히 방대한 책이다. 여러 명언으로 구성된 김대중 대통령의 글을 읽어본 적은 있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여정이 전체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책을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읽게 된 이유)
이 책을 읽게 된 건 지난 대선 때문이었다. 누구나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고 나도 정치적 입장이 있지만 굳이 밝히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대선이라는 것이 단순히 어떤 정당이 정권을 가지느냐를 떠나서 우리나라를 이끌 가장 최고 단위의 리더를 뽑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리더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의 주요 구성)
이 책은 크게 대통령 이전의 김대중의 정치적 고난과 극복, 대통령 시기의 다양한 업적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내용의 큰 구성과 주요 내용, 세부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1. 대통령 이전 - 철학과 사상,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 - 현실주의자, 포용과 통합, 최대 다수의 연합 추구 등
2. 대통령 당선 이후 - 대통령 재임 임기 중 다양한 성과 - 당선자 시절부터 시작된 경제위기 극복 노력, 공정한 정부 운영,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통한 경제 위기 극복, 화해와 통합을 기반으로 한 과거사 청산, 신성장 동력 창출, 남북관계 개선과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 노력 등
(인상 깊었던 부분)
워낙 책이 방대해서 모든 내용을 정리하기는 힘들고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이야기해보자면 그가 '현실에 뿌리내려 꽃을 피운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인'이었다는 것이다.
1. 그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으며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실용주의를 추구했다.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감정보다는 공존, 교류, 통일이라는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접근을 강조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자신의 진영에 갇히기보다는 외연 확장을 중시했으며 언제나 중산층의 지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주화에 있어서도 그가 추구하는 방향성은 역량을 강화하고 외연을 확장하여 최대 다수의 연합을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결국 DJP연합이라는 승부수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인은 성자도 지사도 종교인도 아니다. 현실의 장에 국민과 같이 개입해서 국민을 괴롭히는 구조적인 악과 싸워서 이를 제거하고 국민에게 자유와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해줄 수 있는 현실 개조의 입장에 있는 것이다.”(p.80, 2차 망명에서 귀국한 1985년 2월 쓴 글)
“재야 사회 운동세력이 급진 노선을 취하면 제도권 야당과의 연대가 어려워지고 중산층의 지지를 받기 어려워져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있어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강조했다.”(p.154, 야당과 재야세력의 연합을 추구한 김대중의 생각)
“2차 대전 때 미국은 히틀러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과도 손잡았었습니다. 그건 특수한 목적을 위해 손잡았던 것입니다. 미국이 소련과 체제가 같아서도 신념이 같아서도 아닙니다. 같은 목적을 위해 김종필 씨가 동참하겠다면 나는 협력하겠습니다.”(P. 183, 1985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 내용)
2. 또한 그는 방대한 지식과 깊이가 있는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실력 있는 리더였다. 그가 대통령 재임 시절 거둔 다양한 성과는 모두 수십 년 전부터 구축돼 온 네트워크와 철학, 그리고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부분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경제부터 문화까지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의 정책과 연결된 수십 년 전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한 내공이 있었기에 5년이라는 짧은 재임기간 동안에도 많은 업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당선자 시절부터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것은 수십 년간 구축돼 온 그의 외교 네트워크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또한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는 않는다는 문화 정책, 단순 구휼이나 재의 재분배보다 노동을 통해 안정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생산적 복지 정책 또한 그가 수십 년간 생각해온 철학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한국은 김대중 씨를 대통령으로 두고 있다는 자체를 행운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경제위기를 맞아 몇 가지 고비가 있었지만 IMF와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 전반은 김 대통령을 믿고 한국을 밀어준 측면이 적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P.326, IMF 총재 미셀 캉드시 퇴임 기자회견 중)
"정부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아야 한다. 국민 참여의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참여의 문화는 국민의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하는 자연스러움 속에서 예술인들을 추켜세우고 감싸주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P.353~354, 1992년 발언 중)
"대중 경제는 사회의 실질적인 생산력인 근로대중의 지혜와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케 하는 동시에 그들의 복지를 '제도적으로' 그리고 '사전적'으로 보장하는 경제시스템을 형성하고 그들의 권익을 영속적으로 보장, 확대하는 일련의 경제정책을 말한다."(P.393~394, 1969년 신동아 11월호 논문)
3. 또한 그의 균형과 절제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그는 반일 민족주의를 비판했으며 극일보다는 지일을 추구했던 정치인이었다. 또한 극단주의를 배격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자신의 지지 기반과의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보수 세력의 맹목적 ‘안티’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공세의 빌미를 주지 않으면서 중도보수층을 견인해 보수 강경론이 보수 진영 전체를 대표하는 상황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 민주화운동 세력의 요구를 순차적으로 받아들여 보수세력의 강경한 역공을 막으면서도 개혁의 강도를 서서히 높여가는 전략을 취했다.”(P.318)
“그는 개혁을 위해, 환란 극복을 위해선 자신의 지지 기반과의 충돌마저 감수했던 노련한 승부사였다.”(P.321)
“당시 한 언론인이 김대중 당선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진보 성향의 정치인으로 아는데 왜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헤리티지 재단 설립자와 같이하는가?’ 김 당선인이 남긴 대답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나는 미국 민주당의 거물 정치인인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도 가깝고, 헤리티지 재단의 테드 퓰너와도 잘 지낸다. 나는 진보에서 보수에 이르기까지 친구의 범위가 아주 넓다.’”(P.326)
그가 추구한 화해 통합론은 민주화를 위해 보수세력을 포함한 최대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여기에는 냉전 보수세력의 반발 및 향후 일본과의 화해협력을 고려한 거대한 포석이었다고 한다. 감정에 휩쓸리기보다는 냉철한 현실인식과 균형감을 바탕으로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던 그의 위대함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감상평)
책을 읽는 동안 거인의 어깨를 타고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 떠나질 않았다. 나 스스로도 도덕주의적 정치관을 기반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성찰해보게 되었다. 편을 나누고, 어느 한편에 속해서 상대편을 배척하고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는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인에게는 도덕주의보다 내가 속한 진영의 사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그들을 설득해나가면서 실제 문제가 해결되도록 하는 지혜와 실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그의 삶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정치적으로 어떤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할까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김대중이라는 좋은 레퍼런스를 알게 된 것이 이 책을 읽으며 얻게 된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것을 정리하면서 이 책을 떠나보내려 한다.
다양한 문제에 대한 자신만의 식견과 철학 보유
도덕적 정치관에서 탈피한 실용주의적 사상
극단주의 배격, 화해와 통합 노력
진영을 넘어서는 문제 해결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