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유와 만류와 결심
취미는 강의 듣기 혹은 강의하기
몇해 전 친구가 나를 두고 향상심이 강하다고 평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런 것 같지. 어지간히도 많은 주제를 깔짝거려서, 나는 전공을 물으면 늘 애매하게 대답하게 되었다. 미디어를 전공했는데 홍보나 마케팅보다는 영화와 언론, 문화연구 쪽에 관심이 있었고요. 디자인도 잠시 공부했어요. 아, 학창시절에는 사실 이과였는데, 어쩌고 저쩌고. 내친 김에 그간 거쳐온 것들을 좀 더 적어볼까.
어도비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 프리미어와 애프터이펙트, 라이트룸을 조금씩 다룰 줄 알고, 3D 프로그램은 거의 모르지만 스케치업, 블렌더, Cinema4D, Fusion360을 써봤다. 그래도 가장 자주 쓰는 프로그램은 역시 엑셀, 또는 구글 스프레드시트가 맞겠다. 꼭 같은 분류는 아니지만 노션도 오래 써왔고, 요새는 옵시디언을 새로 써보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으니 투두리스트 같은 할일과 일정 관리 앱에 집착하며 끝없이 이것저것을 써보았는데 결국 이거다 싶은 건 못 찾았다. 직접 만들까 싶어 코딩에 관심이 생겼을 때에는 생활코딩 수업을 들었는데, HTML과 CSS 정도를 배우고 마쳤지만 재미있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개발자들의 역동적인 문화가 꽤나 부럽다.) 프로그래밍이라고 부를 수준은 아니지만 마크다운 문법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유익했다.
그러고 보면 대학교와 대안 대학교에서 배운 게 참 많았다. 사진 촬영과 편집, 포토샵과 인디자인은 양쪽 모두에게서 가볍게 수업을 들었다. 그래도 몸으로 체득하는 일들은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경험한 게 컸다. 약간의 목공, 가죽공예, 활자 조판, 실크스크린, 이때 실크스크린이란 그림을 그리고 감광하는 일부터 시작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배운 판화와 드로잉 같은 것들.
2023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받은 안내 책자와 직접 색칠한 엽서하여간 뭐 하나 깊게 아는 게 없고 자잘한 경험만 많다는 게 오래도록 컴플렉스였지만 이제 마음을 달리하기로 했다. 중구난방이니 뭔가를 '만들어' 낼 때에 시작하기가 쉽다. 행사든 포스터든 책자든 굿즈든 간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알고, 생각의 방향에 갈래길이 많다. 그래서 기술이란 무엇일지 이야기 하자면 한참을 떠들게 될 테니 다시 초점을 모아보자면, 아무래도 더 배우고 싶다.
그간 알고 느낀 것들에서 이것저것 쭉쭉 뽑아내 강의를 꾸려낼 수도 있기는 하다. '혼자서도 영어공부 하는 법'이라든지, '생성형 AI 플러그인 활용법'이라든지, '모임을 꾸리고 홍보하는 팁' 같은 것들. 하지만 어쩐지 강의를 하기보다는 계속해서 배우고 싶다. 내가 강의를 하고 돈을 받는 일도 좋겠지만, 왠지 그러는 대신 유튜브에 강의 영상을 찍어올리고 싶어진다. 내 시간 그 자체는 여전히 배움에 쓰기 위해서라도.
대학원에서 연구 중인 이들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꺼내보았다. 어쩐지 응원해줄 친구들에게만 말을 흘렸다. 공부 중인 친구들은 늘 있었지만, 석사나 박사 진학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들은 대학원은 교육보다는 연구를 위한 기관이라 설명했다. 응원을 받은 만큼 만류한 이들도 물론 있었는데, 연구 주제와 이후 생계를 꾸릴 법에 대한 구상이 확실하지 않다면 추천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뜯어말리는 이들도 말하기를, 그래도 갈 사람은 간다나. 진학을 권한 이들은 내 관심 주제를 듣고 학과와 교수님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입학 절차에 대해 설명해주기도 했다. 당장의 직장이나 등록금, 진로 같은 걸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던 나는 일단 대학원 진학을 단념하거나 등록을 하는 대신 청강을 시작하기로 했다. 관심 있는 학과의 가을학기 강의시간표를 들여다보면서, 최근 3년치 모든 수업의 강의계획서를 내려받아 훑었다.
그렇게 고른 수업 두 개를 두고 열심히 메일을 적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이러저러한 학부 전공을 한 이러저러한 학생입니다. 교수님의 수업 이것에 관심이 있는데, 청강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고 여기에서 글을 쓰고 저기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설명을 드린 덕분인지 첫 수업을 들어보고 결정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좋아. 가보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