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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Nov 19. 2019

도서관에 있는 책, 도서관에 관한 책

수전 올리언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글항아리, 2019)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 경비 스탠 몰든은 도서관과 결혼한 사람입니다. 로스앤젤레스 시청 경비로 20년을 일한 뒤 10년을 꼬박 도서관 경비로 일했죠. 도서관의 10년 역사와 함께한 산증인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게다가 스탠은 독신입니다. 2년 뒤 은퇴할 자격이 생기면 스리랑카로 떠날 생각이죠. 전대미문의 도서관 화재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찾아온 작가에게 스탠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도서관에서 자랐어요.” “책 읽는 걸 좋아하죠올해 목표가 책 100권을 읽는 거예요지금 막 첫 권을 시작했어요장제스 부인의 전기요.”


이 인터뷰가 정확하게 언제 이뤄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출간된 것이 2018년, 우리말 번역본이 올해 10월에 나왔으니 그보다는 이전이겠죠. 도서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아온, 이제 곧 은퇴할 나이에 이른 경비의 독서 목표가 1년에 100권이라니.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 경비 스탠 몰든은 자신이 목표했던 1년에 100권 읽기에 과연 성공했을까? 저 역시 몇 년 전부터 1년에 100권 읽기를 목표로 삼아온 터라 책을 읽으면서 그게 가장 궁금하더군요.



악몽의 날은 1986년 4월 29일이었습니다. 대도시 로스앤젤레스가 자랑하는 공공도서관에 불이 났죠. 섭씨 1,375도까지 치솟은 불길이 장장 7시간 38분 동안 도서관을 활활 태웠습니다. 밖에서 제아무리 물을 뿌려대도 아무 소용 없었죠. 도서관은 빈틈이 없어 보이는 도자기 가마처럼 안에 뜨거운 불길을 머금은 채 속절없이 타올랐습니다. 감히 그 가치를 매기기 힘든, 100만 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장서가 깡그리 타거나 불에 그슬리거나 물에 젖고 맙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도서관 화재였음에도 어떤 이에겐 그저 먼 나라 얘기에 지나지 않았죠. 유명 논픽션 작가인 수전 올리언(Susan Orlean)도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화재 소식을 까맣게 모를 수 있었을까. 작가는 스스로도 의아했습니다. 몇 년 뒤 우연한 계기로 다시 문을 연 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안내인이 이렇게 말하죠.


어떤 책에서는 아직도 연기 냄새가 나요.”


작가는 이후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 화재를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화재가 일어난 그날을 중심으로 도서관의 유구한 역사와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나섰죠. 4년 넘게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하고 수많은 자료를 찾아 읽습니다. 그렇게 1986년 4월 29일에 일어난 화재의 전모는 물론 책을 불태운 인류의 역사, 도서관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때론 열렬하게, 또 때론 담담하게 적어나갔습니다.


눈앞에서 책이 불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도서관 사서들은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눈병과 호흡곤란, 피부 염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호소했죠. 250명 가운데 24명이 전근을 요청합니다. ‘도서관 감기’, ‘도서관 비틀거림병’이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죠. 심지어 화재로 인한 충격에 빠져 배우자와 이혼하는 사례까지 속출할 정도였습니다. 그토록 크나큰 고통을 안겨줄 정도로 책은 삶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걸까요? 스스로를 ‘책 소유의 전도사’였다고 고백할 만큼 새 책이 주는 매력을 신봉했던 작가도 처음엔 비슷한 의문을 품었습니다.


도서관이 도대체 왜 필요한 거지?


이 책은 작가 스스로 품은 의문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도서관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도서관을 드나들었던 추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작가는 생명체로서의 책과 도서관의 존재를 새로이 자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때 도서관이 내게 걸었던 마법이 되살아났다.” 따라서 이 책의 주인공은 도서관과 그곳 사람들인 동시에 몹시도 책을 좋아했고 실제로 책을 쓰는 일을 하고 있는 작가 자신이기도 합니다.


1926년 7월 15일에 문을 연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의 연대기 속에는 뜻밖의 극적인 사연들이 숨어 있습니다. 가난했던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무려 13년 동안 매일같이 도서관을 드나든 레이 브래드버리는 훗날 책이 금지된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죠. 책이 불탈 때의 온도를 제목으로 붙인 저 유명한 소설 《화씨 451》입니다. 공교롭게도 1986년 화재 당시 브래드버리의 책도 모두 타버렸다고 하죠. 이 도서관의 단골 이용자 중에는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도 있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LIBRARY BOOK, 도서관 책입니다. 도서관에 있는 책으로도, 도서관에 관한 책으로도 읽히죠. 우리말 번역서 제목도 꽤 괜찮지만 영어 제목 자체도 꽤 근사합니다. 책을 덮으면서 문득 씁쓸한 기억 하나가 떠오르더군요. 언젠가 도서관을 찍은 최근 영상자료가 있는지 궁금해서 제가 몸담고 있는 언론사의 영상자료를 찾아본 일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2015년 영상이 가장 최근 자료였죠. 심지어 그것마저 제가 과거 문화부에서 일하던 시절에 취재한 것이더군요. 그 뒤로는 도서관을 취재한 기자가 한 명도 없다는 말인가. 문득 아득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작가가 품었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도서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너도나도 스마트폰에 시선을 꽂는 세상에서 어쩌다 눈에 띄는 책 읽는 사람이 인간문화재(?)로 보이는 엄연한 현실에서 말입니다. 그토록 끔찍하게 책을 살고, 아파하고, 사랑한 이들의 역사를 ‘책’으로 읽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답을 찾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이들 각자의 몫일 겁니다. 다만 도서관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는 작가의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제가 생각했던 답 하나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네갈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예의 있게 표현할 때 그 혹은 그녀의 도서관이 불탔다고 말한다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완벽한 표현임을 깨달았다우리 정신과 영혼에는 각자의 경험과 감정이 새겨진 책들이 들어 있다각 개인의 의식은 스스로 분류하여 내면에 저장한 기억들의 컬렉션한 사람이 살아낸 삶의 개인 도서관이다다른 누구와도 완전히 공유할 수 없는우리가 죽으면 불타 사라지는 무엇이다하지만 그 내면의 컬렉션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의 페이지나 낭송되는 이야기로 한 사람 혹은 더 큰 세상과 공유할 수 있다면 당신의 가슴속에 있던 그 무언가는 생명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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