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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Dec 16. 2019

목숨 걸고 단종 시신 거둔 엄흥도

김별아의 소설, 서용선의 그림, 그리고 기증된 문서

그래도 고맙네요그토록 갸륵하고 미쁠 수가 없네요동강에 버려진 당신의 주검을 모셔 장사 지낸 후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먼 곳으로 도망을 갔다는 영월의 호장(戶長엄흥도와 그의 식솔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감읍하고 싶습니다그것으로 그들이 겪은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보상할 수 있다면 마땅히 무릎이라도 꿇고 싶습니다.” 김별아의 소설 영영 이별 영이별에서


65년 세월을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숨죽여 산 여인 정순왕후. 김별아의 소설 《영영 이별 영이별》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다간 단종의 비 송 씨의 마음자리를 어루만져 단종의 원통한 죽음을 둘러싼 시대를 들여다봅니다. 그 모진 세월을 눈 감고 입 닫고 어찌 홀로 견뎌냈을까. 열다섯에 혼인해 열여덟에 남편을 잃었다 했습니다.


아무도 시신에 다가가지 말라는 임금의 추상같은 명령을 거스른 단 한 사람 엄흥도(嚴興道, 1404~1474). 영월 지방의 하급 관리였던 엄흥도는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단종의 시신을 기꺼이 수습합니다. 목숨을 건, 나아가 한 가문의 운명을 건 그 용기는 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 소설은 다시 이렇게 이어집니다.



역적의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하리라!

그만큼 크나큰 위협 앞에 누구도 손을 대지 못했음은 당연하지요당신의 시신이 강가에서 물고기 밥으로 뜯기는 모습이 아무리 참혹하대도누가 감히 죽은 송장과 자신의 산목숨을 쉽게 바꾸려 하겠습니까?”


훗날 정조 때 간행된 《국조인물고 國朝人物考》라는 문헌은 엄흥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엄흥도(嚴興道)가 있어서 피를 토()하며 통곡(痛哭)해 마지않으면서 염습을 도와 양지(陽地)바른 산언덕에 수장(壽藏)하려 할 때 뭇사람들이 말하기를, ‘뜻하지 않은 앙화(殃禍)가 내릴 것이라고 하면서 만류하는 데도 엄흥도가 말하기를, “(()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누대(累代)의 명신(名臣)들과 귀족(貴族)들은 모두 안일(安逸)에 젖어 슬퍼할 줄 몰랐는데하급직(下級職)의 미미한 자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의로움은 당세(當世)에 가장 뛰어났다.


이번엔 틀림없이 이 대목을 찾아 읽었을 소설가의 문장을 읽어봅니다.


엄흥도는 뭇사람들의 말대로 불의와 의를 구별할 줄 아는 의협심 강한 사람인 게지요그래서 주위 사람들 모두가 후환을 두려워하며 그를 간곡하게 말렸음에도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아무도 하지 않는 그 일을 자청했겠지요엄흥도는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아들 삼형제를 이끌고 나서며유언처럼 한마디를 모질게 내뱉었답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떠한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으리라!

미리 준비한 관을 지게에 지고 허위허위 어둠을 뚫고 가는 건정한 사내들의 뒷모습이 슬프고도 장합니다.”


단종의 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른 엄흥도는 이후 고향을 떠나 죽을 때까지 숨어 살았고, 후손들 역시 숨죽여 지내며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합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수백 년이 흐른 뒤에도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죠.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의 작가로 선정한 서양화가 서용선도 그 중 한 명입니다.


서용선 <엄흥도>, 90.5×116.5cm, 캔버스에 유채, 2014


이미지의 힘은 직접적이고도 강력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이 장면을 상상해 봤죠. 그러다 우연히 서용선의 단종 연작에서 이 그림을 만났습니다. 그 어떤 말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단 하나의 이미지. 특유의 선 굵은 필치와 강렬한 색감으로 인해 더 도드라지는 비극성. 저는 단종을 생각할 때마다 이 작품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긴 사설을 늘어놓은 까닭이 있습니다. 얼마 전 엄흥도의 후손들, 정확하게는 영월엄씨 충의공계 광순문 종친회가 그동안 소장해온 고문서와 족보 등 4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탁했습니다. 이 소식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고 그냥 묻혔지만, 기탁된 유물 가운데 엄흥도와 관련한 희귀 문서가 있습니다. 1733년(영조 9) 병조에서 발급한 공문서입니다.


1733년 병조에서 발급한 문서


세로 37.4cm, 가로 205cm인 이 문서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높은 뜻을 기려 그 후손들의 군역(軍役)과 잡역(雜役)을 면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엄흥도의 후손들이 대대로 어렵고 가난하게 살다 보니 조상님께 제사마저 제대로 못 드릴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 부디 직접 가서 부역해야 하는 의무만은 면제해 달라, 이렇게 호소한 겁니다.


이 문서에는 후손들의 호소부터 당시 임금과 신하들의 논의와 결정까지 상세하게 담겨 있습니다. 문서의 뒷부분에서 당시 영조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들으니 그 자손들이 또한 구차하게 되어 관에서 하는 말이 제사를 계속 할 수 없다고 하니 대대로 복호(復戶)하여 면역(免役)하고 해당 조()로 하여금 판결을 내릴 일이다승지가 전하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결국 후손들은 부역을 면제받게 되죠. 이 문서는 2009년 5월 7일 영월엄씨 후손의 집에서 처음 발견돼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사진에서 보듯 관인(官印)이 15개나 찍혀 있고 당상관(堂上官)이 직접 서명한 귀중한 공문서입니다. 원문과 번역문은 택민국학연구원이 2013년 12월 31일 자로 펴낸 《국학연구론총》 제12집에 수록됐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후손들이 문서를 국립중앙도서관에 기탁한 겁니다.


바로 그 문서 한 장에 남은 엄흥도라는 이름 때문에 3년 전에 읽은 김별아의 소설과 그 전에 만난 서용선의 단종 연작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답니다. 단종과 문정왕후의 시리도록 아픈 사랑도 소설을 통해 되돌아보게 되었고요. 긴 세월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후손들이 지켜낸 이 문서 한 장 덕분에 지금의 내가 과거의 그들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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