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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Dec 16. 2019

박물관에서 누리는 안구정화의 축복

<손세기․손창근 기증 서화전 3>(국립중앙박물관, ~2020.3.15)

당대의 천재로 불린 추사 김정희의 제자 가운데 화가를 한 명만 꼽자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소치 허련(許鍊, 1808~1893)입니다. 소치는 유배 길에 만난 추사와 다도(茶道)로 교분을 쌓은 저 유명한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주선으로 추사의 제자가 되는 행운을 얻게 되죠. 칭찬에 인색했던 추사가 “압록강 동쪽에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했을 정도로 뛰어난 그림 솜씨를 인정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임금 앞에 불려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요.


허련 <노송도 老松圖>, 조선 19세기, 종이에 색, 2018년 손창근 기증


대중에게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입니다. 마치 병풍처럼 종이 열 폭에 소나무 한 그루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은 보기 드문 대작이죠. 크기만 압도적인 것이 아니라 과 가지를 섬세하게 표현해놓은 솜씨도 아주 일품입니다. 위아래를 과감하게 잘라낸 구도에서는 현대적인 감각마저 느껴집니다. 소치가 노년기에 완숙한 기량을 유감없이 풀어낸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화폭의 왼쪽 위에 소치가 직접 쓴 글씨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孤標百尺雪中見 눈 속에서 백 척 높이 우뚝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長嘯一聲風裏聞 바람결에 긴 휘파람 소리 듣는다네.


그림과 참 잘 어울리는 구절이죠. 시(詩)와 글씨(書), 그림(畵)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린 까닭을 알 만합니다. 이 귀한 작품은 개성 출신의 실업가 故 손세기(1903~1983) 선생과 장남 손창근 선생이 대를 이어 수집한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이분들이 수집한 고미술품에는 15세기 최초의 한글 서적인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초간본(1447년), 17세기의 명필 오준(吳竣)과 조문수(曺文秀)의 글씨,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정선, 심사정, 김득신, 전기, 김수철, 장승업의 회화 등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문화재급 명품들이 수두룩하게 포함돼 있습니다.



아들 손창근 선생은 2005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중한 문화재를 기탁해 전시와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에는 아흔 살을 맞아 조건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부 기증했죠. <불이선란>을 포함해 기증된 유물은 모두 202건 304점에 이릅니다. 선대에 이어 모아온 귀중한 미술품을 박물관에 선뜻 내놓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손창근 선생은 기증식 당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점 한 점 정()도 있고, 한 점 한 점 애착이 가는 물건들입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 고민 생각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귀중한 국보급 유물들을 나 대신 길이길이 잘 보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내 물건에 대해서 손아무개 기증이라고 붙여주세요.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김정희 <불이선란도 不二禪蘭圖>,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54.9×30.6cm, 2018년 손창근 기증


참 고맙습니다. 뜻있는 소장가의 통 큰 결단 덕분에 이제 박물관에 가서 저 귀중한 문화재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국립중앙박물관도 이 아름다운 기증을 기념해 특별전 <손세기 손창근 기증 명품 서화전>을 마련했습니다. 지난해 11월 23일부터 올해 3월 24일까지 개최된 1부 전시에서 추사의 전설적인 작품 <불이선란>과 글씨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소개돼 관람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7월 7일까지 이어진 2부 전시에선 겸재 정선의 <비로봉도>와 <북원수회도 北園壽會圖>, 현재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선유도>,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출문간월도> 등 미술책에서나 보던 작품들이 관람객들에게 공개됐습니다. 하나하나 작품을 살피다 보면 무엇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죠. 손세기 선생은 국립중앙박물관에만 작품을 기증한 게 아닙니다. 시간을 거슬러 1973년 1월에 이미 고서화 200여 점을 서강대학교에 기증한 바 있습니다. 현재의 서강대 박물관은 이때 기증받은 유물을 토대로 문을 열었습니다.


장승업 <화조영모도> 부분, 조선 1894년, 종이에 엷은 색, 2018년 손창근 기증


이뿐만 아닙니다. 장남 손창근 선생은 2008년에 국립중앙박물관회에 연구기금으로 1억 원을 기부했고, 2012년에는 50여 년간 해마다 자비로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경기도 용인의 1,000억 원대 산림 약 200만 평을 국가에 기부했습니다. 2017년에도 88세 미수연(米壽宴)을 기념해 50억 원 상당의 건물과 함께 1억 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합니다. 기부에 대한 일관된 의지가 없이는 절대 가능하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1, 2부 전시에 이어 기증전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3부 전시가 국립중앙박물관 2층 서화실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화가 오원 장승업부터 조선 최후의 묵죽화가로 불리는 운미 민영익의 시대까지를 아우르는 귀한 작품들이 전시장에 나왔는데요. 그림과 글씨 16점 가운데 12점은 대중에게 최초로 공개되는 귀한 유물들입니다. 한 점 한 점 보고 있으면 저절로 안구가 정화되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된답니다.


민영익 <묵란도>, 조선 19세기 말, 종이에 먹, 2018년 손창근 기증


만약 혼자만 갖고 본다면 이런 귀한 유물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 가면 두 분의 뜻있는 기증을 기념하는 전시 공간 ‘손세기·손창근 기념실’이 있습니다. 두 분이 기증한 작품들이 이곳에서 관람객들을 맞고 있죠. 이곳에서 만난 작품 하나하나에 깃든 기증자들의 아름다운 정신을 되새겨봅니다.


전시 정보

제목: 손세기·손창근 기증 명품 서화전 3 안복(眼福)을 나누다

기간: 2020315()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관 손세기손창근 기념실

작품: 소치 허련의 <노송도> 16(이 가운데 12점은 최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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