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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Feb 15. 2021

고구려인이 남긴 천상의 예술 ‘고분벽화

평창 인면조


지금으로부터 꼭 3년 전, 평창동계올림픽이 개막식과 함께 화려한 막을 올렸죠. 다채로운 볼거리들이 연신 눈길을 사로잡은 가운데, 유독 관람객들의 비상한 호기심을 자극한 ‘신 스틸러’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인면조(人面鳥). 말 그대로 사람의 얼굴을 한 새였습니다. 어찌 보면 기괴하기까지 한 이 낯선 존재의 등장은 뜻밖에도 전 세계 각지에서 큰 화제가 됐고, ‘실검 1위’마저 탈환한 덕분에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에 다시 한번 나타나 인기를 독차지했죠.     


고대 신화에서 인면조는 사실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생김새답게 재앙을 몰고 오는 불길하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죠. 중국 고대 신화집이자 지리서인 《산해경》에도 사람의 얼굴을 한 새가 여럿 등장합니다.     


왼쪽부터 주(鴸), 옹(顒), 부혜(鳧徯)



주(鴸)는 “제 이름을 스스로 불러대며 이것이 나타나면 그 고을에 귀양 가는 선비가 많아진다.”라고 했습니다. 그 옆의 옹(顒)에 대해선 “그 울음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와 같다. 이것이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가문다.”라고 해놓았고요. 역시 사람의 얼굴을 한 부혜(鳧徯)는 “생김새가 수탉 같은데 사람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울음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와 같고 이것이 나타나면 전쟁이 나게 된다.”라고 해서 하나같이 안 좋은 징조를 상징하는 존재들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그 이미지라는 것이 본디 고정된 것은 아니어서, 누가 어떤 상황에 어떤 모습으로 그리느냐에 따라 전혀 상반된 모습의 존재로 탈바꿈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 고분벽화 여러 곳에 등장하는 인면조는 인간의 오랜 꿈인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상징하는 길조(吉鳥)이자 천상 세계의 신성한 존재로 그려졌습니다.


덕흥리 벽화고분 앞방 서쪽 천장에 그려진 인면조

 


북한의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 있는 <덕흥리 고분> 앞방 서쪽 천장에 인면조 두 마리가 위아래로 짝을 이룬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요. 그림 옆에 이름도 적혀 있습니다. 위쪽이 천추(千秋), 아래쪽이 만세(萬歲)입니다. 후자가 바로 평창동계올림픽에 등장한 인면조의 모티브가 된 그림입니다. 이름 자체로 죽지도 늙지도 않는 장수를 상징하는 불멸의 존재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죠. 하지만 그림 자체가 워낙 희미해서 어떤 형상인지 잘 안 보입니다. 그렇다면 아래에 일러스트를 한 번 보실까요.     


국립문화재연구소 《천상의 문양예술: 고구려 고분벽화》(2021)에서 인용

   

원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죠. 이 일러스트는 최근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펴낸 《천상의 문양예술: 고구려 고분벽화》(2021)에 수록된 겁니다. 고구려의 중요한 고분들이 대부분 북한과 중국에 있어서 직접 가볼 수가 없다는 점, 심지어 쓸만한 사진도 구하기 어렵다는 점, 게다가 갈수록 훼손이 심해져 그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 책이 왜 이제야 나왔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한편으론 이런 귀한 자료집을 꾸며준 것이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집니다.     


고분벽화는 무덤 속에 있었다는 이유로 고구려라는 고대 국가가 남긴 많지 않은 유물과 유적 가운데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한반도의 잔인한 운명을 생각하면 고분벽화가 그만큼이나 살아남은 것이 차라리 기적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죠. 게다가 고구려인들이 고분의 천장과 벽면에 그림으로 베풀어놓은 세계는 말 그대로 ‘천상의 세계’라 부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벽화에는 고구려인의 삶과 정신세계가 수많은 형상과 상징으로 아로새겨져 있으니까요.     


안악3호분 서쪽 곁방 서벽에 그려진 묘주와 시종들 모사도 (한성백제박물관)


장막을 두른 평상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인물은 이 무덤의 주인임이 틀림없습니다. 좌우로 두 명씩 작게 그려진 이들은 이 지체 높은 무덤 주인을 모시는 시종들입니다. 이 무덤은 북한의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3호분>입니다. 제작연대를 357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자그마치 1,500년을 훌쩍 뛰어넘는 고대의 유적이죠. 그렇게 오래된 그림인데도 사람을 묘사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귀한 신분을 가진 이의 무덤이었으니 고구려 최고의 화공(畫工)이 온 정성을 다해 그리지 않았을까 싶군요.     


무용총 널방 동남벽에 그려진 가무배송도(歌舞陪送圖)
무용총 널방 서북벽에 그려진 수렵도(狩獵圖)

 

교과서에서도 본 익숙한 장면들입니다. 왼쪽 그림은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망자(亡者)를 떠나보내는 의식을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가무배송도(歌舞陪送圖)란 이름이 붙어 있죠. 긴 소매 옷을 입은 사람들의 옷차림과 자세 하나하나가 고구려의 풍습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중국의 옛 기록에도 고구려인들은 장례를 치를 때 북을 치고 춤을 추면서 먼저 간 이를 보냈다는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 역시 우리 눈에 익은 장면이죠. <무용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냥 그림입니다. 말을 탄 채로 활을 쏘는 인물들 하며 달아나는 호랑이와 사슴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것이 고구려 화공의 그림 솜씨였습니다. 지금 봐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죠. 무덤에 그려진 사냥 장면은 제사 지낼 때 희생물로 쓰일 동물을 잡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사냥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었던 거죠.   

  

각저총 널방 천장에 그려진 삼족오


세 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三足烏). 고구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강력한 상징이죠. 삼족오를 둘러싼 원은 태양입니다. 고대 신화에서 삼족오는 태양 속에 사는 불사조를 뜻하죠. 불사조라는 이름이 가리키듯, 죽지 않는 신성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삼족오 역시 고구려 고분벽화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존재입니다. 그 형상도 각양각색이랍니다.      


무용총 널방 동북쪽 천장에 그려진 <뿔나팔을 연주하는 선인>


책에 수록된 수많은 장면 가운데서도 유독 제 눈을 사로잡은 바로 이 그림. 무용총 천장에 그려진 선인(仙人)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위로 높이 솟은 모자를 쓰고, 길게 휘어진 뿔나팔을 부는 모습이죠. 저고리와 바지 끝이 갈라진 건 하늘을 날 수 있는 옷이라서 그렇답니다. 몸이 날아가는 방향과는 반대로 고개를 돌린 채 나팔을 부는 자세가 역동적이면서도 참 자연스럽게 느껴지더군요. 고구려인이 그린 천상 세계가 마치 이런 모습이라는 듯 천장을 유영하는 선인의 모습. 사진이 아니라 두 눈으로 직접 그 신비로운 형상을 마주하고픈 충동을 마구 부채질합니다.     



한마디로 귀하게 대접받아 마땅한 책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세한 장면들은 물론 그 원형을 일러스트로 되살려놓고 알기 쉬운 해설까지 덧붙여 놓았으니까요. 이 그림들은 평창동계올림픽의 ‘신 스틸러’였던 인면조처럼 그 활용 가능성이 실로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콘텐츠와 상상력의 무한 보물창고인 셈이죠.          

※ 이 글은 아트렉처(artlecture.com)에 먼저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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