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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Mar 22. 2021

역사에 이름을 남긴 어느 기생의 초상화

임진왜란의 역사에 기록된 두 기생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논개(論介, 1571~1593). 모르는 사람이 없죠.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적장(賊將)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의로운 기생. 또 한 사람은 계월향(桂月香, ?~1592). 논개에 비하면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죠. 역시 꽃다운 나이에 평양성에 주둔하던 적장의 살해를 돕고 장렬한 최후를 맞은 의로운 기생.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공로로 두 사람은 천하디천한 기생 신분으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깁니다.     


평안도 관찰사 윤두수가 1590년에 편찬한 《평양지(平壤志)》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계월향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기록은 《평양지(平壤志)》. 평양의 지리, 제도, 물산, 인물 등 평양의 이모저모를 그러모아 집대성한 일종의 백과사전이죠. 2016년에 《평양을 담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누구나 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계월향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때 행장의 부장(副將)에 뛰어나게 용맹한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앞장서서 진을 함락시켜 행장이 그를 소중히 여기고 그에게 일을 맡겼다. 평양 기생 계월향이 그에게 잡혔는데 지극히 사랑을 받아 그를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다. 계월향이 서문에 가서 친척을 보고 오겠다 하니 왜장이 허락했다. 계월향이 성 위에 올라, “우리 오빠 어디 있소하고 연거푸 슬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응서가 답하고 가니 계월향이, 만약 나를 탈출하게 해준다면 죽음으로 은혜를 갚겠소.” 했다. 응서가 그러마 하고 계월향의 친오빠라 하며 성에 들어갔다.     


밤중에 왜장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계월향이 응서를 인도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왜장이 걸상에 앉아서 자는데 벌건 얼굴에 두 눈을 부릅뜬 채 쌍검을 쥐고 있어서 마치 사람을 내리칠 것 같았다. 응서가 칼을 빼 왜장을 베니 머리는 벌써 땅에 떨어졌는데도 칼을 던져 하나는 벽에 꽂히고 하나는 기둥에 꽂혀 칼날이 반이나 들어갔다. 응서가 왜장의 머리를 가지고 문을 뛰쳐나오니 계월향이 뒤를 따랐다. 응서가 둘 다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을 짐작하고 칼을 휘둘러 계월향을 베고 한 몸으로 성을 넘어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그 장수의 죽음을 알고 매우 놀라 소란을 피우며 사기를 잃었다.     


줄거리를 정리해 봅니다.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 가운데 걸출한 장수가 있었다. → 평양성을 다시 탈환하려면 그 장수를 죽여야 했다. → 조선의 장수 김응서가 기생 계월향과 짜고 친오빠로 속여 성에 들어간다. → 자는 틈을 타 적장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 함께 탈출하면 둘 다 붙잡힐까 봐 김응서가 계월향을 죽이고 혼자 성 밖으로 나간다.     


여기서 밑줄 친 두 대목에 주목해 봅니다. 첫째, 계월향은 분명하게 ‘조건’을 겁니다. 만약 나를 탈출하게 해준다면 왜장을 죽이도록 돕겠다고 합니다. 왜군에게 붙잡힌 처지에서 탈출해 살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목숨 걸고 협조한 대가는? “응서가 둘 다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을 짐작하고 칼을 휘둘러 계월향을 베고 한 몸으로 성을 넘어왔다.” 죽음이었습니다. 분명한 타살이죠. 《평양지(平壤志)》의 기록은 계월향이 타살됐다고 말합니다. 이 기록은 나중에 조선 후기 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역사책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그대로 옮겨집니다.      


조선 후기 문인 성해응이 쓴 인물 열전 《초사담헌(草榭談獻)》 (사진 출처: 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문인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이 통일 신라부터 조선 후기까지 기억할 만한 인물 139명의 자취를 모아 기록한 인물 열전 《초사담헌(草榭談獻)》 제1권에도 계월향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요. 앞에서 이긍익이 인용한 《평양지》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은밀히 말하기를 나를 탈출하게 해주면, 죽음으로 보답하겠소.라고 청했다. (중략) 응서가 왜장의 머리를 들고 탈출하려고 하자 계월향이 옷을 끌고 뒤따랐다. 응서가 둘 다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을 거라 짐작하고 계월향을 베었다. 성을 넘어 돌아와 왜장의 머리를 매달자 왜군이 기가 더욱 꺾여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두 사람 다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는 표현에 사용된 도(度)라는 글자는 말 그대로 헤아린다는 뜻입니다. ‘계산된’ 행동이란 얘기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계월향은 살고 싶었지만, 김응서가 계월향을 죽였다는 겁니다. 계월향의 의지에 반해 이뤄진 ‘타살’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소설로 흘러들어 임진왜란을 다룬 군담소설 《임진록(壬辰錄)》에 편입됩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는 계월향의 최후가 어떻게 그려졌을까.     


응서가 이제 성을 넘으려 했다. 그가 비록 용맹하지만, 기생을 업고 무수한 도적을 대적하느라 기력이 쇠잔한 까닭에 즉시 전대로 기생의 허리를 매어 성 밖으로 넘기고자 할 때, 평수맹이 달려들어 단칼에 기생을 베고 바로 응서에게 달려들었다.     


소설에 묘사된 상황은 앞에서 본 기록과 전혀 딴판입니다. 김응서가 계월향을 탈출시키려고 애를 썼는데, 왜장이 칼을 휘둘러 계월향을 살해했다. 타살은 타살인데, 주체가 달라졌죠. 계월향을 벤 사람이 김응서가 아닌 왜장으로 묘사됩니다. 게다가 소설에서는 계월향이라는 이름이 지워진 채 ‘기생’이라고만 호명되죠.     


계월향과 논개 이야기를 소개한 국문학자 서신혜의 《나라가 버린 사람들》(문학동네, 2014)

 

시간이 지날수록 계월향의 존재는 차츰 희미해집니다. 대신 김응서의 업적을 더 돋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바뀌죠. 국문학자 서신혜 교수는 《나라가 버린 사람들》(문학동네, 2014)에서 계월향이 그렇게 어느 순간 버려졌다가 일제강점기에 충렬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과정을 소상하게 살핍니다. 계월향의 죽음은 타살인가, 자살인가. 사전을 찾아보면 그 내용이 천차만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살했다, 김응서가 살해했다, 왜장이 살해했다, 죄다 다르죠. 어느 것이 사실일까요? 아니, 어느 것 가장 진실에 가까울까요? 전문 연구자가 아닌 저로서는 안타깝게도 그 답을 찾아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다만, 최근에 계월향 이야기를 다룬 언론 보도 기사를 찾아보면, 십중팔구는 계월향의 죽음을 자살로 소개했습니다. 사랑하는 임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의로운 기생! 《나라가 버린 사람들》의 저자 서신혜 교수는 이렇게 논평합니다.     


백과사전에서조차 계월향은 김경서(김응서의 개명 후 이름)의 애첩이라고 나온다. 그러면 김경서가 아끼는 여인을 전략상 평양성에 들여보낸 것이 되거나, 계월향이 김경서를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그를 위해 평양성에 들어간 것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순간 계월향의 죽음은 슬픈 사랑 이야기로 둔갑해버리고 만다. 이렇게 계월향의 삶과 죽음은 배은망덕하고 파렴치한 배신의 드라마가 아니라 애달픈 사랑의 이야기로 왜곡된 채 오늘도 그렇게 전파되고 있다.”     


<의기 계월향 초상(義妓 桂月香 肖像)>, 1815년, 112.0×61.2, 종이에 채색, 국립민속박물관


여기, 계월향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2008년 일본 교토에서 발견된 이 초상화는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죠. 그림 상단에 의기 계월향(義妓 桂月香)으로 시작하는 제법 긴 글이 보이는데, 여기에서도 《평양지》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9세기 이후로 보여서, 누군가가 계월향을 사당에 모실 때 그려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정이야 어떻든 여인 초상화, 특히 기생 초상화가 이토록 번듯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계월향이 의로운 기생으로 떠받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의문은 남습니다. 논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왜 계월향은 철저히 잊혔을까. 왜장을 끌어안고 강에 뛰어든 논개의 죽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계월향은 그렇지 않아서? 또는 남쪽 출신인 논개와 달리 출신 지역이 북쪽인 평양이라서?      



특히 후자에 관해선 실제로 꽤 많은 물증이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논개를, 북한에서는 계월향을 기렸습니다. 그것도 경쟁하듯 말이죠. 분단이 현재진행형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서신혜 교수는 계월향과 논개의 이야기를 맺으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이 계월향과 논개가 보여주는 슬픈 역사요, 현재다.” 계월향의 이야기에서 가슴 벅찬 감동 대신에 깊은 슬픔이 느껴지는 까닭이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초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은 참 수수하고 아름답습니다.          



이 글은 아트렉처(artlecture.com)에 먼저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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