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석 Dec 23. 2019

《조선왕조실록》은 이야기의 보물 창고다!

박영규 《에로틱 조선》(웅진지식하우스, 2019)

야릇한(?) 제목의 이 책이 다루는 소재는 조선 사람들의 성(性)입니다.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죠. 《실록》은 국가의 공식 기록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뭐 이런 것까지 다 적어놓았나 싶을 정도로 자질구레하게 보이는 온갖 것들이 《실록》에 담겨 있죠.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한 치정 사건들도 수두룩합니다. 《실록》을 적어나간 사관(史官)의 기록 정신은 성(性) 문제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습니다.


“북부의 참봉 신자치의 아내 이씨가 그 어미 이씨와 더불어 신자치가 간통한 계집종 도리를 시샘하여 머리를 깎고 고문했으며, 쇠를 달구어 가슴과 음문(陰門)을 지지고 몸에 살점을 남기지 않고 흥인문 밖 산골짜리에 버려두었으니 그 잔인함이 막심합니다. 청컨대 이씨 모녀를 국문하게 하소서.”


피가 뚝뚝 묻어날 만큼 잔인하기 짝이 없는 보복 행위를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남편과 잠자리를 한 여자 종에게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복수하기 위해 아내와 친정 엄마가 계획적으로 벌인 가혹 행위였죠. 책에 소개된 사례들은 무수하게 많습니다. 강간은 물론 근친상간에 성기 절단, 승려와 환관들의 섹스 스캔들까지 《실록》은 남김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의 한 장면


《실록》에는 실상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야깃거리를 찾아 헤매는 이들에겐 최고의 1차 자료인 셈이죠. 지금도 실록의 기록을 소재로 한 수많은 책과 영화가 쏟아져 나오지 않습니까? 최근에 본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2019) 역시 세조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가짜 뉴스를 통한 여론 조작의 실상을 우리 시대에 빗대어 흥미롭게 그렸습니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들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제 아무리 기록정신에 충실했다손 치더라도 사관(史官)이 어느 당파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 시대에 통용되는 윤리와 가치관의 수준과 범위에 따라 실록에는 필연적으로 주관(主觀)과 윤색(潤色)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성(性) 문제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고요.



그래서 《실록》과 같은 1차 원전의 경우 비판적인 독서가 필요합니다. 시대적 맥락 속에서 문맥을 살펴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하죠. 그건 철저하게 읽는 이의 몫입니다. 그런데 그 방대한 《실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심지어 전문 연구자조차도 전체를 읽어본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서 읽겠죠.


예컨대 이 책의 저자가 《실록》에서 찾아낸 아동 성범죄 사건에 관한 기록은 7건에 불과합니다. 과연 7건뿐이었을까. 대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죠. 이 가운데 6건은 천민 남자가 천민 여아를 상대로 한 것이었고, 나머지 1건은 천민 남자가 양인 여아를 겁탈한 경우라고 합니다. 양반이 저지른 더 많은 범죄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저자는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아동 성폭행은 일어나지 않은 게 아니라 은폐되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작가들은 이야깃거리를 찾아 《실록》의 바다를 헤맵니다. 먼저 찍는 사람이 임자인 셈이죠. 역사는 누구에게나 이야깃거리를 던져줍니다. 그 광대한 기록의 바다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아내 엮어내는 것이 작가의 일이죠. 하지만 작가가 역사에 대한 균형 감각을 잃으면 책은 단순한 흥밋거리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점을 충분히 의식했을 겁니다. 더구나 소재가 성(性)이다 보니 이야기가 단순한 눈요깃거리에 빠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인 흔적이 역력합니다. 책의 앞부분이 조선시대에 성적으로 착취당할 수밖에 없었던 기생과 궁녀, 의녀, 첩의 이야기에 할애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죠.

작가의 이전글 난생 처음 끝까지 읽어본 천자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