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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Dec 27. 2019

‘조선의 독서왕’ 백곡 김득신

김득신 지음, 신범석 옮김 《국역 백곡집》(파미르, 2006)

가을이라. 경치 한 번 좋을시고. 선선한 바람 맞으며 책을 펼쳐 읽자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네그려. 자, 그럼 오늘도 《열전》의 〈백이전〉으로 시작해볼거나. 가만 있어보자. 이제껏 몇 번을 읽었더라? 여기 서산(書算)이 있군 그래. 달포 전에 세 번을 읽었으니 도합 일억 일만 이천이백서른세 번. 아직 한참 멀었네 멀었어. 자, 그럼 오늘의 독서 시작!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군주의 두 아들인데그들의 아버지는 아우인 숙제에게 뒤를 잇게 할 작정이었다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왕위를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고 했다그러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달아나 버렸고 숙제도 [왕위에오르려 하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고죽국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참, 책 읽느라 내 소개가 늦었구만. 김득신(金得臣)이라 하네. 1604년생이지. 벗들은 편하게 백곡(栢谷)이라 부른다네. 내 조부님은 왜란 때 저 유명한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끄신 김시민(金時敏) 어르신이시지. 선친도 동래부사와 경상도관찰사를 지내셨고. 당대의 명문가로 이름 깨나 얻은 안동 김문이 바로 내 집안일세.


백곡 김득신의 시문을 모은 문집 《백곡집(柏谷集)》[사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 동명이인과 헷갈리지 말게나. 김득신 하면 으레 환쟁이와 나를 혼동하지 뭔가. 심지어 한자까지 똑같으니 원. 그 그림 그렸다는 김득신이란 친구는 나보다 딱 150년 늦게 태어났더군. 그래도 같은 이름을 쓰는 이가 후대에 꽤 이름을 날렸다고 하니 과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네. 뭐 아무려면 어떤가.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오세. 솔직히 말하면 난 머리가 나쁘다네. 어릴 때부터 그랬어. 내 또래들은 세 살 적부터 동서고금의 시문을 줄줄 읊어댔고, 특출한 녀석들은 신동(神童) 소리를 들으며 큰 사랑을 받고 자랐지. 세상 참 불공평하지 뭔가. 내가 처음 글공부를 시작한 게 몇 살이었는지 아나? 열 살이었네. 한참 모자란 아이라며 주변에서 얼마나들 혀를 끌끌 차던지….


그래도 내 부친은 머리 나쁜 자식을 늘 감싸주셨어. “나는 저 아이가 저리 미욱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니 그것이 오히려 대견스럽네. 하물며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하지 않았는가?” 대기만성이라. 참 그럴듯한 말이지. 어쨌든 내 글공부는 한없이 더뎠다네. 남들은 과거시험 보러 갈 나이 스물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다운 글을 지을 수 있었을 정도니까. 그런데 가만, 내가 ‘백이전’을 어디까지 읽었더라?


중국 송나라 때 화가 이당(李唐, 1066~1150)이 백이 숙제의 이야기를 그린 채미도(采薇圖)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는 주나라를 종주(宗主)로 삼았다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의롭게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었다그들은 굶주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는데그 가사는.”


어쩌다 나같이 머리 나쁜 사람이 이 집안에 태어났는지 모를 일이야. 조부님이나 선친을 반에 반만 닮았어도 이렇게까지 손가락질 받으며 살진 않았을 텐데. 선친께선 결국 내가 과거에 급제하는 걸 못보고 눈을 감으셨지. 낙방에 낙방을 거듭했지만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라 하셨어. 육십이 될 때까지는 과거시험을 계속 보라는 유언까지 남기셨다네.


그리고 거짓말처럼 내 나이 육십이 되기 딱 한 해 전에 기어이 과거에 급제를 했지. 자네들 시대의 표현으로 하면 ‘59세에 행정고시 합격’ 정도가 되겠구먼. 비결이 궁금한가? 그런데 잘 생각해보게. 과거시험도 간신히 급제한 내게 무슨 대단한 비결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나? 쯧쯧. 머리는 나빠도 그 정도는 안다네. 여기, 내가 지은 시 한 수 들려줌세.


奇哉馬史伯夷傳    기이하구나 사기의 백이전

厓老山翁讀萬番    서애와 오산은 만 번을 읽었지

吾亦讀之充億數    나 또한 억 번이나 읽었으니

胸中疑翳豈伊存    가슴속에 의심나고 어두운 게 있을손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반복해서 읽기! 이게 바로 내 비결이라네. 남들은 한 번만 읽고도 이해한다는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당최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결심했지. 뜻이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읽고 또 읽자!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붙어보자. 이런 심정으로 책과 씨름을 했다네.



그런데 그런 나를 향해 또 주변에서들 손가락질을 해대지 뭔가. 평생 놀림 받고 괄시 받으며 살아왔으니 그런 것쯤 아무렇지도 않네만. 그런데 이번엔 내가 ‘백이전’을 ‘1억 번’이나 읽었다는 구절로 트집을 잡더군. 오해하지 말게. 내가 살던 시대의 억(億)은 자네들 시대 기준으로 하면 ‘10만’을 가리킨다네. 억(億)이라고 하니 ‘억’ 소리 나는 것 같은가.


나보다 훨씬 후대에 태어난 천재 중에 다산 정약용이란 친구가 있지. 이 친구가 글쎄 내가 책을 읽은 횟수를 가지고 자네들 시대에 유행한다는 ‘팩트체크’라는 걸 했다지? 다산이 쓴 〈김백곡독서변(金柏谷讀書辨)〉이란 글의 앞부분은 나도 참 마음에 들었네.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이후로 상하로 수천 년과 종횡으로 3만 리 사이에서 독서에 있어 근면하고 걸출한 자로는 마땅히 백곡을 으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머리가 나빠서 되풀이 읽은 것인데 이렇게까지 칭찬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구먼. 허허. 사실 ‘백이전’은 짧은 글이네. 다해봐야 글자 수가 893자밖에 안 되지. 그나마도 백이(伯夷)에 대한 기록은 겨우 215자에 불과하다네. 제 아무리 내 머리가 나쁘다 해도 ‘백이전’을 몇 번 읽었는지조차 몰랐겠나. 11만 3천 번 읽은 것은 ‘팩트’라네. 팩트! 그런데도 다산 이 친구는 이렇게 따졌더군.


한 번 생각해 보면선비 중에 독서에 뛰어난 자의 경우 하루에 '백이전'을 백 번 정도 읽을 수 있다그렇다면 한 해에 3만 6천 번을 읽을 수 있으니도합 3년이 되어야 가까스로 1억 8천 번을 읽을 수 있다그 사이에 어찌 질병과 우환과 오고 가는 문답이 없을 수 있겠는가. (중략내가 생각하건대 독서기는 백곡이 지은 것이 아니다그가 별세한 뒤에 그를 위하여 전해들은 것을 기록한 자가 있었을 것이다.”


책 읽은 횟수를 표시하는 도구인 서산(書算). 읽은 횟수에 따라 홈을 젖히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사진출처: 국립청주박물관]


누가 다산 정약용 아니랄까봐 참 꼬치꼬치 따져놓았어. 나도 반격해볼까. 이 글에 치명적인 오타가 있어. 독서기(讀書記)가 아니라 독수기(讀數記)가 맞네. 몇 번 읽었는지 내 일일이 다 적어놓았지. 목록에 있는 건 36편이라네. 우리 시대에는 다들 그렇게 글을 읽었네. 사람마다 읽은 횟수가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가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읽은 건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이런 글을 써서 남긴 것이네.


갑술년(1634)부터 경술년(1670) 사이에 장자와 사기대학과 중용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읽은 횟수가 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독수기에는 싣지 않았다만약 뒤의 자손이 내 독수기를 보게 되면내가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다시 말해 1만 번 이상 읽은 것만 36편을 정리한 것일세. 후손들이 이런 나의 독서 편력에 엽기적이라느니, 미련하다느니 여러 말들을 했더군. 둔재가 노력해서 일가를 이뤘다는 식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는지 나에 관한 꽤 많은 일화도 남겨놓았고 말이야. 어쨌든 내가 살던 시대는 물론이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 같은 독서가가 없다는 얘기를 들으면 평생 그토록 지독하게 책을 읽은 것이 결코 헛되지는 않았구나 싶어 안도한다네.


자네들 시대에 나에 관한 글을 꽤 많이 쓴 정민이라는 선생이 한 번은 이런 얘기를 했더군.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엉덩이로 한다. 타고난 재능보다 성실한 노력이 값지다.”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네. 그래서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미치지 않고서 어찌 이를 수 있으리. 부디 미치시게. 독서에 미쳐보시게나. 책에서 돈이 나오고 떡이 나오기야 하겠나마는 또 혹시 모르잖나. 나도 이제 마저 〈백이전〉을 읽어야겠네. 가만 있어보자. 이제껏 몇 번을 읽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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