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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Dec 27. 2019

김초엽이라는 작가를 발견하다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

올 여름 보도 자료를 하나 받았습니다. 김보영이라는 작가가 한국 SF작가로는 처음으로 미국 최대 출판그룹 하퍼콜린스에 소설 3권의 판권을 수출하며 영어권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취재를 해볼 요량으로 자료를 뒤져봤죠. 그랬더니 김보영이란 이름은 이미 장르 문학계에선 꽤 유명하더군요. 궁금증은 더 커졌습니다. 강원도 평창에 가서 작가를 직접 만났죠.


그 무렵이었습니다. 김초엽이라는 카이스트 출신 신예 작가가 소설집을 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읽었죠. 내친 김에 물었습니다. 작품이 좋다고 칭찬하더군요. 김초엽은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에서 처음으로 중단편부분 대상과 가작을 동시에 수상하는 기록을 씁니다. 이 문학상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바로 김보영 작가였답니다.



그 뒤로 한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초엽의 짧은 소설이 보도 자료와 함께 도착합니다. 창비에서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 열다섯 번째로 펴낸 《원통 안의 소녀》였죠. 조금은 갸우뚱했습니다. 뭐가 좋다는 말이지? 소설은 잊었습니다. 그리고 또 몇 달 뒤, 서점에 갔다가 김초엽의 소설집을 샀습니다. 해 넘어가기 전에 읽어봐야 했으니까요.


저는 이 소설집을 평소 습관처음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대신 마음 가는 대로 왔다갔다 읽었습니다. 한 편 한 편 읽어가면서 알았죠. 왜 이 작가를 주목하는지 말입니다. 사실 저는 SF 소설과 꽤 오랜 인연이 있습니다. 필립 K. 딕의 소설을 전작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죠. 아직도 제 책장엔 스타니스와프 램의 《솔라리스》와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등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터져나가는 책장에 빈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덜어내는 와중에도 살아남은 책들입니다.



장르 문학에 대한 뚜렷한 편견 같은 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죠. 확실한 계기가 없었다고 할까요. 아무튼 김보영이라는 작가를 ‘발견’했고, 그 덕분에 김초엽의 소설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도처에서 김초엽이라는 이름을 만났습니다. 문학잡지 《자음과 모음》 2019년 가을호(통권 42호)의 커버스토리는 거창하게도 ‘SF 비평의 서막’이었습니다. 장르 문학이 이젠 어엿한 비평 대상이 됐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죠.


잡지에 실린 <기지(旣知)와의 조우: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SF를 위한 첨언>이란 글에서 문학평론가 박인성은 김초엽 문학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평가했습니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에 수록된 텍스트들은 단순히 문학적 해석 가능성이 풍성한 SF라서 좋은 것이 아니라 아주 섬세하고 정확한 장르적 시도를 수행하고 있기에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이 텍스트들은 어설픈 하드 SF류의 소설들과는 명백하게 구별되는데, SF를 온갖 복잡한 세계관과 자질구레한 설정들이 아니라 특정 하위 장르의 범주에서 정식화된 이야기 문법으로 독자에게 아주 선명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SF라는 장르의 특성에 편승한 것이 아니라 SF라는 그릇 안에 좋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녹여 냈다는 뜻입니다. 김초엽의 소설이 한때 순수문학잡지에 수록됐다는 사실은 독자들은 물론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이기도 했고요. 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SF의 관습과 도상문법에 충실하면서도 동시대적 현실과의 연결성을 통해서 능동적인 해석까지 유도하는 텍스트는 어느 때든지 드물다이 책의 수록작들은 우선 좋은 이야기일뿐더러좋은 SF라는 이중 과제를 매끄럽게 달성한다.”



좋은 이야기이자 좋은 SF. 김초엽 소설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적한 표현이 아닌가 싶군요. 김초엽의 첫 소설집이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 2위에 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김기중 서울신문 기자는 《출판문화》 2019년 12월호(통권 647호)에 쓴 <6개 키워드로 살펴본 2019 출판계>에서 SF를 포함한 ‘비주류’ 문학의 약진을 ‘반란’으로 표현하면서 김초엽의 소설을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2019년도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 하반기 선정 도서에도 이름을 올렸죠.


김초엽은 올해 우리 문학계가 얻은 가장 큰 수확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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