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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pr 03. 2022

재야 미술사학가가 쓴 근대 미술의 결정적 장면들

황정수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푸른역사, 2022)

책의 쓸모란 무엇인가? 재미와 유익이겠다.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하고, 앎과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더없이 좋다. 내게 넓고도 깊은 미술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스승 황정수 선생님의 책이 그러하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란 제목의 이 책에서 저자는 흔히 ‘근대’라 불리는 20세기의 전반부에 서울 북촌과 서촌 일대에 흔적을 남긴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북촌 편과 서촌 편 각 권으로 나눠 다뤘다.     


책의 성격을 보자면, 미술사와 답사기의 만남이다. 일단 가독성(可讀性)이 좋다. 책을 펼친 게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그야말로 술술 읽힌다.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도 아무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 내용이 퍽 알차다. 일제강점기 미술사의 상당 부분은 그 시대를 향한 반감이나 거부감으로 인해 넓게, 깊이 연구되지 못했다. 이빨이 빠진 채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단연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두 권의 책은 앞서 저자가 펴낸 <경매된 서화>(시공아트, 2005),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이숲, 2018)의 성과를 고스란히 반영할 뿐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저자의 외로운 노력이 비로소 제대로 빛을 보게 한 귀중한 성과다.     


미술 시장에서 오래 잔뼈가 굵은 미술 상인이었던 덕분에 저자는 수많은 미술품을 사고파는 과정을 통해 박학다식(博學多識)은 물론 단단하고도 예리한 안목(眼目)까지 키웠다. 책의 곳곳에서 우리는 지금껏 전혀 몰랐던 미술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그 영역도 그림과 글씨는 물론 공예, 건축 등으로 폭넓게 뻗어나간다. 게다가 단순히 미술품의 진위를 가리는 수준을 넘어 예술성을 판단하는 뛰어난 눈까지 지녔으니 실로 시대의 감식안(鑑識眼)이라 해도 좋겠다. 거기다 일일이 발품을 팔아가며 미술사의 현장들을 섭렵한 답사의 흔적까지 담아 이론과 현장, 작품과 작가를 아우르는 훌륭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었으리라.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할 것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그런 경험을 저자가 돈벌이가 아닌 미술사 연구에 쏟고 있다는 점이겠다. 소중한 경험과 뛰어난 안목을 연구자들이 꺼리는 시대를 들여다보고, 끊임없이 작품과 자료를 모으고, 꾸준히 글을 써서 알려온 그간의 노력이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작은 빛을 보게 된 것이 무엇보다 반갑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관절 미술 분야의 전문가란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미술평론가도 흔하고, 미술사학자도 흔하지만, 그런 것이 없이도 자기 분야에서 독보적(獨步的) 지식과 안목을 갖췄다면 그런 분이야말로 진정 전문가라 불려야 마땅하리라. 더 중요한 것은 균형(均衡) 잡힌 시선은 물론 시대와 미술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시각이 있어야 한다는 점일 텐데, 책에서 여러 미술가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대목들을 보면 저자의 뚜렷한 소신(所信)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식견과 안목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은 뒤로 저자로부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숱한 가르침을 받아왔다. 미술을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술을 이만치 사랑하는 분이 또 있겠나 싶었다. 그런 지극한 애정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으니, 거두절미하고 책을 사서 읽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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