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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Oct 09. 2023

미술관 순례기① 그 산에 가면 닻미술관이 있다!


산 중턱에 미술관이 있다. 국도에서 주택가로 접어든 뒤에도 꽤 올라가야 한다. 게다가 산길이라 차선이랄 것도 없는 외길. 맞은편에서 차가 달려오면 어쩌나 싶지만, 알아서 양보하고 피하고 빼주니 쓸데없는 걱정이다. 야트막한 산에 이렇듯 호젓한 길이 있었구나. 새 소리 들리는 숲속 작은 마을 한쪽에 미술관이 소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닻미술관이다. 누리집의 소개 글은 이렇다.     


경기도 광주 진새골에 위치한 닻미술관은 예술을 통한 창조성과 영성 회복을 기치로 2010년 10월 개관했습니다복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내면적인 성찰이 이루어지는 유기적인 공간을 제안합니다이곳에 깃든 사람들이 예술적 체험을 함께 나눔으로써 개인의 상상력감성직관을 회복하고 참된 아름다움에 눈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생기를 얻는 치유의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닻미술관은 예술을 통해 삶을 나누는 커뮤니티를 꿈꿉니다.     




작은 수도원을 연상시키는 낮고 고요한 공간. 고색창연한 나무문 안에 작은 뜰, 그 중정 공간을 디귿 자로 빙 둘러 1층 전시장이 펼쳐졌고, 건물 뒤쪽으로 작은 2층 공간이 있다. 방문객들을 사로잡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미술관 한쪽에 있는 카페다. 주변 경관이 워낙 아름다워서 카페에 앉아 차 한 잔과 함께 여유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삿된 마음이 절로 치유된다. 조금 더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카페 뒤쪽 산길을 잠시 걸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동안 꾸준히 전시회 소식을 알려왔는데도 화답할 기회가 없었으니 미안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미술관 순례의 첫 장소로 고른 이유다. 지금 닻미술관에서는 사진작가 웨인 레빈(Wayne Levin)과 브라이언 오스틴(Bryant Austin)의 2인전이 열리고 있다. 제목은 <무경계(No Boundaries)>. 산과 구름, 바다, 그리고 그 너른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들의 세상에는 아무 경계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경계를 짓고 사는 존재는 오로지 인간뿐.     



전시장에 들어서면 바닷속을 헤엄치는 고래를 포착한 사진과 아주 오래전에 바다 밑에서 솟아오른 산과 구름이 어울린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도 태초의 지구에서는 바다 밑에 있었을 테니.     



대부분 흑백 사진인데 딱 하나 눈부신 색채를 발하는 사진이 있다. 전시장 한쪽 벽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커다란 고래. 브라이언 오스틴이 2009년에 촬영한 <밍크 고래(Minke Whale)>라는 작품이다. 작가의 설명을 보자.     


이 작품 속 고래의 이름은 엘라입니다호주의 해안 그레잇 베리어 리프에 도착한 나는 엘라의 등지느러미가 물살을 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5일 동안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나는 엘라를 만나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우리는 최대 8시간 동안 서로의 곁에 머물기도 했습니다때로는 14마리의 고래들이 주위에 있었지만 엘라만큼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오는 이는 없었습니다그녀의 호기심과 신뢰감 덕분에 나는 80mm 렌즈의 핫셀 중형카메라로 그녀의 몸을 세밀하게 합성한 전신사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촬영이 있는 날그녀는 내가 타고 있는 배를 열심히 따라왔고나는 바로 물에 들어가 우리의 초상 작업을 계속했습니다하루의 끝에서 그녀가 다시 한번 내게 다가왔는데그때 카메라의 배터리가 방전되었습니다나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내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그때가 내 눈으로 직접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작가의 이 말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하루 8시간씩 바다에서 헤엄치며 작가가 찍고자 했던 건 바로 고래의 초상이었구나.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신뢰를 얻어야 했을 테고, 작가는 마지막으로 시선을 맞춘 순간을 감동적으로 증언한다. 덩치 큰 고래의 몸을 저리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건 구석구석 촬영한 뒤에 아주 세밀하게 합성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새롭다. 사진을 다시 보게 된다.     



고래의 마음으로 볼 것

나와 너의 경계 허물기


닻미술관의 프로젝트는 닻프레스라는 이름으로 선보이는 아트북에 더 무게가 실려 있는 것 같다. 닻프레스가 한정판으로 발간한다는 아트북은 국내에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외에서는 제법 높은 품격을 인정받고 있다고. 아트북 라인업에는 우리나라 1세대 대표 사진가로 꼽히는 주명덕 작가를 비롯해 이번 전시의 두 주인공 이름도 보인다.     


간간이 빗방울이 바람에 섞여 떨어지는 것조차 정겨운 어느 가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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