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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Oct 06. 2023

박물관 유람기① 안산에 가면 성호박물관이 있다!

 

경기도 안산(安山)이 낳은 걸출한 두 인물이 있으니, 학자로는 성호 이익이요 화가로는 단원 김홍도라. 하여 이 고장의 자랑인 두 분을 기리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지었으니, 성호박물관과 김홍도미술관이다. 두 곳은 심지어 무척 가깝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이 누구인가. 조선 후기 실학사상에 초석을 놓은 선구자로 『성호사설(星湖僿說)』이라는 명저를 남긴 분이다. 선생의 호(號)는 성호(星湖). 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해당하는 곳으로, 선생의 집 가까이에 있던 호수의 이름이었다고. 그 호를 딴 성호박물관이 2002년 5월에 문을 열었다. 주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호로 131이다.     



넓고 쾌적한 공원에 안긴 성호박물관은 도로 쪽에서 보는 모습과 반대편 공원 쪽에서 보는 모습이 다르다. 도로 쪽 입구 옆에는 선생의 대표 저작 『성호사설』의 한 장을 새긴 금속 조형물이 놓여 있다. 오늘 유람은 이곳에서 시작한다.     



건물은 지하 1층에 지상 2층이다. 상설전시실은 2층에 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을 따라 성호 선생의 생애를 연도별로 적은 나무판을 설치해 놓았다.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에 개략적인 삶의 행로를 미리 볼 수 있도록 한 것. 동선을 효율적으로 이용한 사례다.



성호 선생 흉상에 잠시 눈길을 준 뒤 전시실로 들어서면 ‘성호 이익의 가문’부터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주이씨 가문의 가계도를 보면 쟁쟁한 이름이 여럿 눈에 띈다. 처음 보이는 인물은 선생의 증조부인 소릉 이상의(李尙毅, 1560~1624). 복제본이긴 하나 초상화 초본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에 사대부의 초상화는 주인공이 ‘공신’이었음을 알려준다.



성호 선생의 가문은 17세기를 대표하는 글씨 명문가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은 선생의 셋째 형 옥동 이서(李瑞, 1662~1723). 글씨로 이름을 날린 당대의 명필이었다. 전시실에서 옥동의 필적을 여러 점 볼 수 있다. 옥동은 거문고 연주로도 유명해서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옥동의 거문고가 ‘옥동금’이란 이름으로 전시돼 있다. 이 거문고는 금강산 만폭동에서 벼락을 맞아 쓰러진 오동나무를 가져다 만든 것으로, 일곱 가지 이름을 불릴 정도로 연주자만큼이나 유명세를 날렸다 한다.



전에 『성호사설』을 읽고서 선생의 초상이 남아 있나 찾아봤더니, 성호박물관에 걸린 영정이 실제로 있었다. 성호 선생의 영정은 1780년(정조4)에 처음 제작돼 전해지다가 1950년 6․25전쟁 때 소실됐고, 이후 성호의 후손인 이돈형(1927~2002)의 주도로 1989년에 다시 그렸다. 실제로 전시장에 걸려 있는 선생의 종손 이삼환(李森煥, 1729~1813)의 초상화와 비슷하게 그려졌음을 볼 수 있다.



성호 선생은 기존의 학설과 담론을 끊임없이 의심했다. 심지어 성리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 주자(朱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순 없었으니, 일찍이 필자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가짜뉴스임을 밝힌 내용만 따로 뽑아서 선생을 ‘조선의 팩트체커’라고 소개한 바 있다.


평생 벼슬자리와 거리를 두고 책과 씨름하며 학문에 몰두했던 선생은 그렇게 평생에 걸친 탐구 성과를 책으로 묶어냈으니, 그것이 바로 『성호사설』이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읽기는 쉽지 않다. 앞에서부터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에 수록된 글들이 그나마 비교적 수월하다.



성호 선생의 인품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 있다. 인사문(人事門)에 포함된 제노문(祭奴文). 종의 제사를 지내주면서 쓴 글이다. 어느 날 우연히 자기 땅을 돌봐주던 종의 무덤을 지나가다가, 몇 년 동안 아무도 제사를 지내준 적 없다는 말에 애잔함을 느낀 성호 선생은 직접 글을 지어 먼저 죽은 종의 넋을 기린다.    

 

모년 모월 모일 초야에 묻혀 사는 성호(星湖)옛 종 아무개의 무덤에 제사하노라나라의 옛 풍속에 종과 주인의 관계를 임금과 신하에 비교했다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반드시 은혜를 갚는 것은 당연하지만주인이 박대하면서 종에게 충성을 바라는 것이 어찌 이치이겠는가너는 평생 부지런히 윗사람을 받들었으니내 사실 네 덕을 많이 보았다그런데 어찌 차마 너를 잊겠는가너의 자식이 불초하기에 내 일찍 훈계한 적이 있었는데과연 파산하여 살 곳을 잃고 떠나버렸다네가 죽어 무덤에 풀이 우거졌는데도 벌초하기를 생각하는 자가 없구나살아서 고생이 심했는데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늘 굶주리니어찌 슬프지 않으랴?     


내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너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약간의 떡과 과일을 갖추어 너의 외손을 시켜 무덤 앞에 술 한잔을 붓게 하고대충 지은 몇 마디 말로 너의 무덤 곁에서 향을 사르고 고하노라네 비록 문자를 모르지만귀신의 이치로 보면 통할 수 있는 법정성이 있으면 반드시 느끼리니너는 이 음식을 흠향하거라.     


선생의 인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다. 성호박물관 유람의 시작과 끝은 『성호사설』이다. 전시실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에 놓인 책 세 권. 그 속엔 자신의 학문이 세상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학맥을 이어 훗날 조선의 실학이 꽃을 피웠다.   

  


다섯 가지 주제로 꾸며진 상설전시의 마지막은 책가도. 성호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한 이들을 기리는 공간이다. 그리고 맞은편 벽에 기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새겼다. 작지만 알찬 전시를 마무리하는 살뜰한 마음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성호박물관에서 얻어갈 수 있는 가장 값진 것 중 하나다. 해설사에게 부탁하면 친절하고 상세하게 전시실을 안내해주니 이 또한 유익하다.     



상설전시와 별도로 <진주유씨 안산에서 꽃피다>라는 소박한 기획전시도 마련됐다. 진주유씨는 안산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성호 선생 가문과 밀접한 교분을 쌓았다. 김홍도의 그림 스승으로 알려진 표암 강세황이 진주유씨 집안의 사위여서, 실제로 표암은 생의 많은 시간을 안산 처가에서 보냈다. 자연스럽게 김홍도가 표암에게 그림을 배울 수 있는 환경도 이때 만들어졌다.     


상설전시관을 돌아 나와 영상실에 들어서면 성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영상을 볼 수 있다. 박물관 유람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한 군데 더 가볼 곳이 있다. 박물관 건물에서 채 5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는 성호 선생 묘소다. 



박물관에서 도로를 건너 도로에서 바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하나, 주택가 골목 안에서 계단을 오르는 길이 하나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좋다. 입구에 핀 맨드라미 보는 기쁨은 덤이다.     



묘는 왼쪽의 묘소와 오른쪽의 건물로 나뉜다. 평생을 초야에 묻혀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정진한 성호 선생의 개결했던 삶을 보여주는 소박하되 기품있는 묘소. 주변도 청결하게 잘 가꿔져 있다. 비석을 읽어보니 선생과 두 부인을 합장한 묘다. 옆으로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재실 경호재(景湖齋)와 신주를 모신 사당 첨성사(瞻星祠)가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평소에는 문을 닫아놓아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평생 배움의 길에 서 있었던 성호 이익. 그가 꿈꿨던 더 나은 세상. 먼저 죽은 노비를 추모하는 글을 써줄 줄 알았던 그 마음. 성호라는 크고 아름다운 분과 만난 그날 가을 하늘은 한없이 푸르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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